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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있는 풍경

아프니까 책이다

노바리 2016. 6. 26. 10:49

아파서 빌빌대며 책만 조금씩 읽는다. 연재에 대비해 미리 책을 읽어두어야 해서 고른 책, <트라우마의 제국>

너도나도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현실이 불편했는데 이 책이 그런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저자들은 트라우마가 고통을 이야기하는 대명사가 되기까지의 역사와 그에 따른 사회적 파장을 추적한다. 읽기 쉽지는 않다. 무엇보다 저자들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기보다 그로 인한 영향과 사회적 재배치를 설명하기 때문에 나처럼 '그래서 누가 옳단 말이냐?' 식으로 정답을 구하는 데 익숙한 독자에게는 쉽지 않은 독서가 이어진다.

그들은 나처럼 트라우마라는 말에 피로감을 느끼고 더 나아가 그 말의 진실성마처 의심하는 입장에 대해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된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는데, 전에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에서 쓰나미 같은 재난이 일어났을 때 서구정신의학이 긴급심리치료를 하는 데 대해 비판한 걸 보고 공감했던 내게는 그 명암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이들은 트라우마는 무엇보다 보상과 관련된 개념이기에 사회정치적 성격을 강하게 띨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특히 주목되었던 것은 프랑스 툴루즈 화학공장 폭발 이후 피해자 지원에서 정신병자와 공장노동자들이 배제되었다는 사실. 저자들은 이를 통해 트라우마 수사를 활용할 수 없는 집단은 여기서 배제된다고 지적한다.

또 하나 인도주의정신의학의 개입에 대한 서술은 저자들의 경험이 담겨 더욱 생생하고 깊은 울림을 준다. 그들은 인도주의의료활동은 진료와 증언을 결합하는데 여기서 갈등과 편향이 나타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그리고 트라우마을 활용한 이들의 증언이 오히려 피해자들 각각의 경험이 가진 유일성을 희석시키고 트라우마라는 진단으로 수렴해버림으로써 역사성 없는 역사를 낳는다고 비판한다.  

이밖에도 그들은 트라우마라는 말이 지배적이 되면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모두 같은 언어로 수렴되는 것의 문제점도 이야기하는데, 이걸 읽으면서 요즘 우리 사회에 팽배한 피해자의식을 떠올렸다. 요즘 도처에서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터뜨리고 폭력을 행하면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이것이 심리학과잉과 연관된다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된다. 잘못을 지적하면 나도 이런 트라우마가 있다는 식으로 항변하는 이들을 볼 때마다 트라우마라는 말이 너무 쉽게 너무 편의적으로 쓰인다는 불만을 갖게 된다.

저자들의 지적처럼 트라우마라는 말이 인간성을 옹호하고 이를 바탕으로 인간인 서로에 대한 공감을 이끄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잉사용의 폐해도 분명한 듯하다. 

아무튼 책은 열심히 읽고 배운 것도 많았으나 리뷰를 쓰는 건 포기. 이 책으로 리뷰를 쓰다간 지난번 <죽은 자들의 웅성임> 대문에 병이 심해졌듯 병이 깊어질 게 분명하다. 

끝으로 책에서 눈에 띈 한 줄. "혁신은 오래된 일에 새로운 질문을 하는 것이다."

뭔가 이상한 새로운 짓을 하는 게 혁신인 줄 알았는데 아차, 싶었다. 새로운 질문을 하는 것, 다시 생각하는 것, 새롭게 생각하는 것, 참 어렵다. 


부담없이 읽은 책들. 

<13*67> -'책과삶'에서 김용언 편집장 인터뷰를 보고 읽은 책. 단편들의 모음으로 이루어진 장편인데 잘 짜인 추리소설. 

<러브 레플리카> - 기발한 발상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마음을 사로잡지는.. '루카'는 좋다.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 관심이 큰 탓일까, 좀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래 엄마야> - 발달장애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의 인터뷰로 구성된 책. 빠르게 읽히지만 마음은 가볍지만은 않다. 많이들 읽고 더 서로 이해할 기회가 만많아졌으면 싶다.

<예이츠와 모드곤> - 시 강연을 위해 시인들의 삶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만난 책. 읽었다는 것만 메모해둔다.



<충분하다> - 쉼보르스카의 마지막 시집. 몇 달 전 사놓고 조금씩 읽다가 이참에 곰곰 다시 읽었다. 역시! 쉼보르스카처럼 죽기 전 '충분하다'가 홀가분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체념이나 득도가 아니라 정말 여한없이 잘살아서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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