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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3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 본문

죽음의 문장들

애도3 -텐도 아라타의 소설 <애도하는 사람>

노바리 2016. 5. 9. 11:54

 “그렇다면 ...화장하기 전에 얘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다카히코가 말했다. “귀는... 마지막까지 감각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돌아가신 뒤에도 ‘혼의 귀’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들어주실 거예요.”


영하 10도가 넘는 맹추위가 일주일째 계속되고 있다. 아침 해가 부연 창을 뚫고 들어왔지만 이불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다. 일찌감치 일어날 이유가 없다. 서둘러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옷을 챙겨 입고 나갈 곳이 없어진 건 오래 전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몇 군데 입사원서를 넣고 떨어지고를 반복하고 뒤늦게 대학원에 가서 다른 꿈을 꾸다가 서른에 되었을 때, 내겐 꿈도 직장도 없었다. 그 시절 꿈이 없는 게 힘들었는지 명함이 없는 게 더 힘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무것도 없었고, 힘들었다. 한때는 아무것도 없이 완전히 바닥에 떨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을 거라 믿으면서. 허나 막상 바닥에 떨어지니 원하는 게 뭔지는 여전히 모르겠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냥 춥든 덥든 매일 꼬박꼬박 아침이면 일어나 나갈 어딘가가 있었으면,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 태연한 얼굴로 내밀 명함 한 장만 있었으면 했다. 아마 그 명함 한 장이 내가 바라는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 그렇게 사소할 거라고 믿진 않았지만 결국 그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깨달음 속에서 삼십대를 -스물에도 마흔에도 쉰을 넘긴 지금까지도 내가 가장 좋은 나이라고 믿는 그 황금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 시절 몇 번이나 도서관에서 잉게보르그 바하만의 <삼십 세>를 펼쳤다가 다시 덮곤 했다. 그녀의 삼십은 찌질한, 너무도 찌질해서 말하기도 창피한 내 삼십과는 너무 다른 듯하여, 아니 너무 다를까 봐 두려워 페이지를 넘길 수 없었다. 내 부끄러운 삼십이 들킬까 봐 차마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그런 세월을 보내고 간신히 명함을 가졌다. 많은 나이, 적은 월급 같은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오직 한 장의 명함, 누구에게나 떳떳이 내밀 명함 한 장, 내 시간의 쓸모를 증명할 작은 종이 한 장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 내겐 명함이 필요 없다. 그런 것으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좋은 시간을 위해 얼마나 기를 썼던가. 아니지, 그런 시간을 위해 지금도 여전히 기를 쓴다. 그 덕분에 나는 늦은 아침 햇살이 비추는 창 아래서 소설책을 꺼내든다. 오늘은 기를 쓰지 않겠어. 무엇에도 애쓰지 않고 그냥 하고픈 대로 하겠어. 그냥 있겠어. 이대로.

어제 저녁 빌려온 소설책을 읽는다. 책은 베개로 써도 될 만큼 두껍다. 하지만 꼭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 뭐든 내키는 대로 해도 되는 날이다. 그렇게 결심한 날이고 그래도 되는 책이다.


책은 예상한 대로 잘 읽힌다. 일본 소설이 태반 그렇듯이. 그러다 ‘혼의 귀’라는 글귀에서 심장이 딸꾹질을 하더니 마지막에 이르러는 결국 눈물이 터진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별 수 없다. 말기암으로 죽어가는 준코의 마지막 한 순간 한 순간을 읽으며 별 수 없이 아버지를 떠올린다. 생의 마지막이 다가오면서 준코는 말이 안 나오고 눈이 잘 떠지지 않는다. 하지만 의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여전히 생의 이편에서 이편의 말을 듣고 이편을 헤아린다. 그러나 그런 자신을 표현할 수 없을 뿐.


집에 갔을 때마다 아버지는 늘 졸고 계셨다. 눈을 감은 채 머리를 한쪽으로 늘어뜨리고. 내가 “아버지! 저 왔어요.” 하면 “응” 들릴 듯 말 듯 한숨처럼 내쉬며 눈을 뜨셨다. 그렇게 잠깐 내 쪽을 보시고 이내 다시 눈을 감으셨다. 밥상 앞에서도 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조금씩 잡수셨다. 오물오물 이유식을 먹는 아기처럼 밥 한술을 입안에서 궁굴리다가 “아버지, 좀더 드셔야 약을 드시죠.” 하면 “응” 하고 기운을 내 씹으셨다.


10년 전 파킨슨 병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약을 잘 챙겨 드시며 철저히 관리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약을 꼬박꼬박 챙겨 드신 건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맞겠다는 한결같은 각오의 반영이었다. 내가 아는 한 평생 맛있어서 과식을 하는 법은 없으셨다. 언제나. 왜 먹어야 하는지 이유가 명확하면 드셨다. 맛은 괘념치 않으셨다. 음식 솜씨가 별나게 좋은 어머니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무엇이든 맛있게 해주는 아내가 있었으니 맛에는 까탈을 부릴 이유가 없기도 하셨으리라. 그것이 맛있는 음식으로 아내노릇을 하려는 어머니를 때로 서운하게 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러셨다. 밥을 먹고 약을 먹었다. 그러나 말씀은 없으셨고 내게 그 총총한 눈을 돌리시지도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는지. 아버지는 무엇보다 말씀이셨고 눈빛이셨기에 그 변화를 나는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면

그건 우리 아버지의 말씀이었다고 생각할 만큼

아버지는 내게, 우리 식구들 모두에게 큰 말씀이셨다.


아버지가 쓸 데 없는 말을 한 적이 있었던가. 아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耳順 이후로 당신의 쓸데없는 말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도록 오랜 시간 공들여 당신의 말씀을 헤아렸고, 당신의 작은 실수로 우리가 오래 아프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이고 다독이셨기에. 그렇다고 당신이 내게 주지 않은 사랑까지 내가 안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아니다. 아버지는 내가 원한 사랑을 내가 원한 방식으로 주지 않으셨다. 그래서 뭐가 달라지는가.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나는 나다. 아버지는 아버지로 나를 사랑하고 나는 나로 당신을 사랑했으니,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당신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서고, 당신도 나를 사랑해서고, 다 그만두고 당신과 내가 오십 년이라는 긴 세월을 아버지와 딸이란 이름으로 서로에게 간절한 관계를 성실히 맺어와서다. 내가 원한 만큼의 사랑을 원한 대로 주지 않았다고 달라질 건 없다. 나 또한 당신에게 당신이 원한 만큼 원하는 대로 드리지 못했다. 그래서 이토록 당신이 그립고 미안하다.


<애도하는 사람>을 읽으며 후회한다.

미리 읽었더라면 아버지가 조는 듯 눈을 감고 있을 때도 혼의 귀는 떠 있는 걸 알고 아버지께 못다 한 말을 했을 텐데. 미리 읽었더라면 아버지가 힘겹게 숨을 내뱉을 때, 홀로 죽음과 마주섰을 때 그 밝은 혼의 귀에 대고 말씀드렸을 텐데.

아버지, 당신이 제 아버지여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아버지, 힘드셔도 조금만 참으세요. 못난 딸이 당신을 보고 있어요. 저도 곧 당신을 따라갈 거예요. 당신이 견뎌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요. 당신처럼 죽음을 맞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다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버지, 당신이 제 앞에서 길을 내주셔서 제가 힘이 납니다. 아버지,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차가운 병원차에 실어 홀로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죽자마자 차디찬 냉동실로 보내지는 오늘의 시스템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대신, 당신이 평생 그랬듯 그것이 최선인지 반문했을 것이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말하지도 못했다. 당신을 혼자 보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당신의 귀는 얼마나 추웠을까.

 

베갯잇이 흥건하다.

정오다. 이렇게 늦도록 이불 속에 있다니, 아버지라면 눈살을 찌푸리셨을 것이다. 아흔 살이 넘고 파킨슨병 때문에 손 떨림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여전히 신문을 읽고 뉴스를 챙겨보고 사무실에 나가셨던 아버지, 이토록 햇살이 흥건한 정도까지 늦잠을 자는 일 따윈 해본 적이 없는 아버지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한마디 하셨을 것이다. 살아있음에, 세상이 너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네게 주어진 시간에 최선에 다하라고 엄하게 꾸짖으실 것이다.

일어난다. 찬 공기에 소름이 돋는다. 늦었지만 도서관에 가야지. 마감할 원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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