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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니체의 문장 본문
어느 날 또는 어느 밤 한 악마가 가장 깊은 고독 속에 잠겨 있는 당신의 뒤로 슬며시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너는 현재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을 다시 한 번, 나아가 수없이 몇 번이고 되살아야 한다. 거기에는 무엇 하나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기쁨, 모든 사념과 탄식, 네 생애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시 되풀이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똑같은 순서로. 이 거미도 나무들 사이로 비치는 달빛도, 지금의 이 순간까지도 그리고 나 자신도. 존재의 영원한 모래시계는 언제까지나 다시 회전하며 그와 함께 미세한 모래알에 불과한 너 자신 또한 같이 회전할 것이다.” 당신은 땅에 엎드려 이를 악물고서 이렇게 말한 악마를 저주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악마에게 “너는 신이다. 나는 이보다 더 신적인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고 대답하는 그런 엄청난 순간을 체험한 적이 있었던가? 이런 사상이 당신을 지배한다면 그것은 현재의 당신을 변화시킬 것이고 아마 부숴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해서 가해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무수히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에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캄캄한 허공에 떠 있었다. 혼자였다. 나는 혼자 허공 중에 떠 있는 나를 보았다. 두렵다기보다 아득했던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나의 내부에서 나오는 소리이되 내 것은 아닌 목소리가 말했다.
너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지금 이대로. 지금과 똑같은 너로 똑같이 살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난 공포가 나를 덮쳤다. 허공의 나와 그 나를 보는 나에게 동시에, 공포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숨이 막혔다. 숨이 막혀 꺽꺽대다가 간신히, 끼익 하는 비명을 토하며 간신히 깨었다. 꿈이구나.
그걸 깨닫는 순간 다시 새로운 공포가, 이번엔 슬픔과 함께 밀려들었다. 이 삶이, 이 끔찍한 삶이, 보잘것없는 나라는 인간이 다시 이 보잘것없는 삶을 되풀이하리란 예고가 그때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공포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그때 알았다. 내가 나를, 나의 삶을 긍정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도 끔찍하게 여긴다는 것을.
그것은 예기치 못한 절망이고 슬픔이었다. 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거나 내 삶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절망할 줄은 몰랐다. 지금의 삶을 되풀이한다는 것을 내 자신이 이토록 깜깜한 저주로 여길 만큼 내 삶을 끔찍이 여기는 줄 나는 몰랐었다. 어둔 새벽, 나는 크게 울지도 못하고 꺽꺽 신음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그 절망을 벗어날 길이 없다는 절망에 짓눌려 공포에 떨면서 울었다.
아마도 서른 넷 아마도 가을의 일이었다. 시간은 희미해도 내용은 선명하다. 꿈도 절망도 속수무책의 슬픔까지도.
그것은 내가 겪은 최초의 죽음이었다. 그 꿈을 꾸었을 무렵 어머니는 심각한 위암으로 위의 90%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6개월 넘게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독한 항암제 때문에 머리칼은 다 빠졌고 거의 먹지도 못했으며 조금만 먹어도 비위가 상해 토하기 일쑤였다. 또 위가 거의 없어서 조금만 양을 초과해도 응급실로 실려갈 만큼 심각한 후유증을 겪었다.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나, 토하는 어머니 옆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나는 그 고통을 공감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친척이 거의 없었던 우리 집에서 그것은 처음 겪는 죽음이었고 우리는 이 생면부지의 죽음을 감당하느라 외로웠다. 나는 고통이 사람을 얼마나 외롭게 하는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에게 신물을 냈고 그런 내 자신을 혐오했고 우리가 각자의 아픔 속에 고립되어 있다는 데 절망했다.
그 꿈은 그 무렵에 꾼 것이었다.
다행히 어머니는 그 이후로 서서히 회복되었고 삶을 건강히 이어갔다. 나 역시 그날 이후로 여러 욕망을 품곤 했다. 하지만 이전처럼 오래 머물진 못했다. 나를 사로잡는 열망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리란 걸 알면 갓 구운 빵처럼 탐스럽던 그것들은 금세 식어 굳어버렸다. 나는 죽음에 사로잡혔다. 오래 전 나를 유혹했던 죽음은 이후 공포가 되었다. 비로소 죽음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그래봐야 아주 조금뿐이지만.
십여 년 뒤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읽다가 그도 같은 말을 들었음을 알았다. 나와 달리 니체는 해발 2천 미터 실스마리아 고원의 호숫가 숲을 산책하던 중 계시를 들었다. “번개처럼 필연성을 지닌 하나의 사상이 갑자기 번득”였고 그는 기쁨에 차 웃고 울었다. 체험의 형식도 반응도 달랐지만 체험의 말은 같았으므로 나는 희망을 품었다. 내 절망을 벗어날 길을 그가 가르쳐줄지도 모른단 희망에 부풀어 문장을 읽었다.
무엇보다 나는 악마가 깊은 고독 속에 잠긴 사람에게 속삭인다는 서술에 공감했다. 꿈을 꿀 당시 나는 고독했고 내가 느낀 공포는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비유와 어울렸으므로. 그러나 그는 내가 들은 속삭임만을 전할 뿐이었다. 그 절망적인 속삭임을 수긍하고 -나처럼 그것이 진실임을 알고 이미 완전히 받아들인 상태에서- 어떻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래서 그 계시를 발전시켰다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또 읽었다. 이른바 ‘영원회귀’라고 불리는 계시를 그가 어떻게 사상으로 전개했는지 궁금해서. 그의 사상이 내 절망에 답을 주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리고 그를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어서 들뢰즈의 니체도 읽었다. 그러나 들뢰즈는 내 절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니체가 왜 계시의 체험을 이야기하며 ‘악마’를 등장시켰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는 듯했다. 니체는 자신이 들은 말이 희망의 계시이기 전에 절망의 저주가 될 수도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자신의 해석을 갖고 있던 들뢰즈에게는 그런 가정 자체가 없었다. 그에게는 절망이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내가 보기에 그는 자기 자신에게 완전히 절망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니체는 그저 하나의 전거에 불과했다.
나는 들뢰즈를 덮고 니체에만 매달렸다. 그라면, 평생 자신의 삶에 전전긍긍했던 니체라면 나처럼 구렁에 빠진 인간이 어떻게 삶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지 말해주지 않을까. 그리하여 죽음에 대한 공포를 벗어날 수 있는 아주 좁은 샛길이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내가 저주라 여겼던 그것을 니체는 어떻게 햇빛 찬란한 “정오의 순간”이라 부르는지 놀랍고 부럽고 궁금했다. 똑같은 말이 왜 그에겐 저주가 아니라 영원회귀의 영감이고 축복이 될 수 있는지, 그 긍정을 가능케 한 힘은 무엇인지. 나는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그가 남긴 유고(遺稿)들을 읽고 또 읽었다.
그러나 그의 문장들은 길을 보여주지 못했다. 물론 니체는 나름의 길을 제시한다. 그는 “‘ 너는 이것이 다시 한 번, 또는 무수히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라는 질문은 가장 무거운 무게로 너의 모든 행위 위에 놓이게 될 것이다.”라는 경고를 통해 영원회귀의 저주를 영원회귀의 계시로 바꾸는 존재의 의지를 촉구한다. 그는 존재에게 요구한다. 이대로 수없이 반복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을 매 순간 모든 행위에 던짐으로써 내 행위를 결단하라고. 그렇게 결단한 행위는 나라는 존재를 혁신할 것이고 혁신된 존재는 모든 행위의 반복을 기꺼이 수긍할 것이라고.
언뜻 보면 맞는 말이었다. ‘영원회귀’를 질문하는 순간 삶은 바뀐다. 그러나, 그러나 내 꿈속에서 영원회귀는 질문이 아니라 선고였다. 하나의 당위였다. 니체는 당위를 넘어선 의심을 촉구한다. 그러나 왜 의심해야 하는가? 니체의 해석과 달리 니체가 들은 악마의 말은 ‘이 삶이 다시 한 번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느냐?’는 물음이 아니었다. 악마는 그저 무수히 반복될 것이라고 진술할 뿐이다. 삶은 선택이 아니라 운명이다. 니체는 운명의 필연을 선택의 질문으로 바꾼다. 감당할 수 없는 운명을 마치 의지에 의해 감당할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것은 교묘한 바꿔치기고 운명은 그런 식의 눈속임으로 속여 넘길 수 없다. 나는 이제 니체도 버린다. 그는 아무 대답도 갖고 있지 않다.
꿈에서 나는 ‘반복되기를 원하는가?’를 묻지 않는다. 물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물을 수 있는가. 죽음이란 모든 질문이 불가능한 궁극의 지점인데. 죽음은 어떤 질문도 허용하지 않는다. 질문은 돌아봄에서 나온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돌아봄은 불가능하다. 죽음은 그냥 닥친다. 내가 왔다. 나를 받아들이라. 나는 그냥 받아들인다. 나는 이렇게 살았고, 이게 나다. 나는 이대로 죽는다. 내가 누린 모든 기쁨은 물론 내가 저지른 모든 잘못들과 함께 나는 죽는다. 그래서 나는 두렵다. 그것이 죽음의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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