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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두려워해도 괜찮아 본문
◉ 괴테
“75세가 되니 이따금 죽음에 관해 생각하게 되네. 그때마다 내 마음은 차분해져. 왜냐하면 우리의 정신은 절대로 소멸하지 않기 때문이지.” -1824년 5월 2일 에커만과의 대화.
“죽음은 그 어떤 기이한 것입니다. 죽음은 언제나 그 어떤 믿을 수 없는 것, 예기치 않은 것으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즉 죽음은 흡사 갑자기 현실이 되는 어떤 불가능성이지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실존으로부터 우리가 전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어떤 실존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것이며, 남아 있는 이들에게 아주 심오한 전율을 안겨줍니다.”
-1830년 2월. 대공모 루이제의 죽음과 관련해 이야기하다
◉ 이노우에 키요시
“크고도 큰 불안이로구나, 얘야. 이렇게 큰 불안은 어느 누구도 쫓아낼 수 없어. 나도, 의사도, 도저히 쫓아낼 수 없다...”
-일본의 역사학자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淸)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혼수상태로 들어가기 전 딸에게 한 말.
한국인의 약 60%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조사결과를 보았다. 놀라웠다. 죽음이 무섭지 않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정말일까 싶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역시나 대부분 무섭지 않단다. 어째서 두렵지 않나요? 묻는 내게 사람들은 되물었다. 왜 무서워요? 죽음을 모르니까, 모든 것이 끝이니까,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것이니까… 말하다 보면 답하는 내가 궁색해졌다.
내 두려움을 설득할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죽음이 두려웠다. 물에 빠졌을 때, 갑작스런 불안발작(공황장애)으로 숨이 막혔을 때, 혼자만의 절망으로 못 견디게 외로웠을 때 슬프고 무서웠듯 죽음이란 그런 것이라 상상했다. 오로지 나 혼자 겪는 미지의 고통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말을 들을 때면, 그래서 가끔 묻고 싶었다. 죽음을 어떻게 상상하는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했는지. 두렵지 않다는 그 초연함이 실은 죽음에 대한 무지나 무시의 반영은 아닌지 의심했다. 왜냐하면 괴테가 그랬듯, 죽음을 실감하지 못할 때 사람은 얼마든지 초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흔다섯에 죽음을 차분히 받아들일 수 있다고 말했던 괴테는 여든이 넘어 큰 병을 앓은 뒤 죽음은 ‘알 수 없는 폭력적인 것’이며 소중한 이들의 죽음은 ‘깊은 전율’을 안겨준다고 고백했다. 이즈음 그는 죽음을 앞둔 이를 방문하거나 가까운 이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피했다고 한다.
숱한 걸작을 낳은 괴테의 상상력도 오지 않은 죽음은 상상하지 못했던 셈인데 그러고 보면 많은 이들이 죽음보다 죽을병에 걸려서 오래 고통을 겪는 게 더 무섭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고통은 현실이되 죽음은 추상이므로. 한데 정말 ‘편안한’ 죽음이면 죽을 만할까? 아니, 죽는 자에게 ‘편안한’ 죽음이란 게 있을까? 흔한 말로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아프거나 아예 자다가 죽으면 내게 닥친 죽음을 편안하게 맞을 수 있을까? 글쎄, 죽어보질 않았으니 나는 모른다. 나만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가 정말 어떤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는 편안한 죽음이란 죽는 자의 편안함이 아니라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는 입장에서의 편안함이다. 저만큼 오래 잘살다가 별 고통 없이 죽었으니 편안하겠구나, 라는 타인의 판단이다. 죽는 자를 바라보는 산자의 시선이다.
물론 편안해 보이는 죽음을 죽는 사람이 정말 편안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죽음을 겪는 사람이 편안한지 불안한지는 아는 이도 없고 알 수도 없다. 죽음으로 들어간 이는 말할 수 없으니. 그가 어떤 심정으로 이 생애 최초의 사태를 맞이하는지,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숨을 쉬느라 안간힘을 쓰며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아서 지켜보는 이는 알 수가 없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무엇보다 이 알지 못함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 알지 못함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언젠가 죽을 것을 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이 우주, 이 별, 이 나라가 언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내가 언제 어떻게 생겨나서 지금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게 되었는지 설명해주는 과학은 있어도 죽음의 실상에 대해 가르쳐주는 과학은 없다. 과학이 말해주는 건 나는 반드시 죽을 거라는 사실뿐, 그 순간 내가 무엇을 어떻게 겪을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오리무중인 현실, 내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그러나 반드시 겪게 마련인 현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게 이상한 일일까.
죽음에 초연했던 괴테가 막상 죽음이 자신의 현실이 되자 달라졌듯이, 오래 살았다고 해서, 많이 배웠다고 해서 죽음 앞에 담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으로 꼽히는 수잔 손택은 두 차례 암에 걸렸고 예순여섯에 백혈병이 발병해 일흔하나에 세상을 떴는데, 아들 데이비드 리프가 마지막 나날을 기록한 <어머니의 죽음>을 보면 그녀는 죽는 날까지 죽음을 피하기 위해 기를 썼다. 그녀만이 아니다. 십 년간 암을 앓다 세상을 뜬 도쿄대학교 종교학 교수 키시모토 히데오는 암 통보를 받았을 때의 심경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이 2주일동안 인간의 생명에 대한 집착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 생명이 직접적인 위기에 노출되면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소용돌이치고 미친 듯이 날뛰는지, 얼마나 인간의 전신이 손긑 발끝 세포에 이르기까지 필사적으로 죽음에 저항하는지... 나는 그것을 몸으로 느꼈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고 모자란, 미성숙한 인격의 반영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괴테나 손택 같은 최고의 지성이라면 당연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리라 기대한다. 아니, 꼭 이런 유명인이 아니어도 그 정도 나이를 먹었으면 죽는다고 울고불고 할 일은 아니라고 여기며, 성숙한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생사의 이치를 자연스레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싯다르타 왕자가 모든 걸 버리고 구도의 길을 나선 것은 이 자연스러운 일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늙음과 죽음은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겪는 이는 물론이요 보는 이에게도 지극한 고통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며, 모든 것에 의미와 목적을 부여하던 이전까지의 삶이 이 필연 앞에서 무력해지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무력하게 고통을 겪는 인간을 보며 싯다르타 왕자는 두려움에 몸부림쳤고 그로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 사람이기에 피할 수 없고 사람이기에 그 필연을 인식하면서 겪어야 하는 이 고통을 어찌할 것인지, 어떻게 하면 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이 질문을 내 삶의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죽음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고통, 허무를 직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차피 죽게 마련인데 미리부터 걱정할 게 뭐냐? 다들 죽는데 죽음이 뭐가 두려우며 고민할 게 무엇이냐?’고 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바로 그게 문제라고 말한다.
세인은 언젠가 어딘가에서 죽음이 자신을 덮쳐 올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한다. 그러나 그 죽음은 자기 자신에게는 아직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도 당분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죽음이란 ‘내 것이 아닌 세인의 것’이란 생각을 퍼뜨린다. 여기서 ‘사람’이란 그 누구도 아니다. … (그리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자체가 이미 현존재를 불확실한 것으로 보는 것, 소멸에 대해 공포를 갖는 것, 암울하게 세계로부터 도피하는 것 등으로 간주된다. 세인은 이때 죽음에 대한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내지 못한다.
--<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니 세인이니 하는 하이데거 특유의 용어는 몰라도 괜찮다. 그가 말하는 것은 ‘사람은 죽는다’는 통념이 가진 허구성이다. 한마디로 ‘나는 죽는다’고 말하는 대신 ‘사람은 죽는다’고 말함으로써 우리는 자기에게 닥친 죽음을 추상화한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나는 죽는다.”고 말하기 전에 “사람은 죽는다.”고 말하는가? 하이데거는 언뜻 철학적으로 보이는 이 진술 속에 사실은 ‘나의’ 죽음을 실감할 수 없는, 아니, 실감하고 싶지 않은 인간의 교묘한 회피가 숨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회피는 임종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죽지 않을 거라고 위로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런 말을 하지만, 하이데거는 그것이 오히려 위로하는 사람에게 위안을 주며 이런 식으로 죽음의 불안을 회피하는 관행이 인간을 죽음으로부터 소외시킨다고 비판한다. 그의 말처럼, 죽음을 두려워하는 걸 부끄럽게 여기는 세상은 두려움과 함께 죽음 자체를 소거시키고, 죽음에 대한 사고를 소거시키고, 죽음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민을 소거시킨다. 그리고 이런 세상에서 사람들은 죽음의 불안을 직시할 용기를 잃는다.
죽음은 일상의 평온을 뒤흔들고 삶을 불안하게 한다. 죽음이 무엇인지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만큼이나 자연스런 일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이 모름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 불안을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불안을 떠안으면서 죽음을 생각해야 하는가?
미국의 실존주의 정신의학자 어빈 얄롬은 왜 환자들에게 죽음을 일깨워 죽음의 불안을 부채질하느냐는 비판에 대해 “자신의 죽음에 대면하는 것은 개인의 긍정적인 성장을 촉진할 수 있다”고 답했다. 그는 죽음은 신경증의 기원과 상관이 없다고 믿었던 프로이트와 달리 죽음과 대면하는 것이 사람들의 슬픔을 치료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그의 임상경험이 담긴 많은 책들은 죽음과는 전혀 무관한 듯 보이는 우울과 무기력, 분노와 슬픔이 사실은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기인하며 이를 깨달았을 때 사람들은 그 불안을 직시하고 삶을 일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죽음이 자신에게 닥친 절대적 현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은 크나큰 충격을 받고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를 회피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고민할 때 사람은 새로운 시야를 얻는다. 암 진단을 받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던 기시모토 히데오는 긴 투병생활을 겪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다가 문득 죽음을 정면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특별하지만 죽음도 결국은 ‘헤어질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살면서 이별의 슬픔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괴로움을 견뎌낸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이별인 죽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전혀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면 어떨까 깨달았다. 그 준비란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며 죽어가는 일이다. 죽음이란 그런 이별 방식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방법은 억지로 죽음에서 눈을 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작은 죽음의 이별을 되풀이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다.”
내가 죽음을 생각하는 까닭은 이런 마음의 경지에 도달하고 싶어서다. 살아서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과의 인연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 에이는 슬픔을 느끼는데 하물며 죽음을 어찌 감당하랴. 그러나 결국 죽음은 오고 나는 죽어야 한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도 죽는다. 그 슬픔, 그 절망을 견디는 길은, 슬픔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슬픔을 인정하고 ‘미련을 떨치지 못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뿐. 마지막이 닥쳤을 때 부디 내가 이런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인위(人爲)의 평생을 살았으되 마지막에는 자연에 순명할 힘을 가졌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되뇐다. 너는 죽는다. 죽고 싶지 않지만 죽을 것이니 그때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게 네 죽음을 받아들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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