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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 시 한 줄

생활

노바리 2021. 7. 11. 17:45

1

생활이 책갈피처럼 쌓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쌓이는 것은 생활이 아니기에. 먼지를 털어내고 먼직 날아가는 것을 본다. 움직이지도 않고 날고 있는 먼지를 본다. 기분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다. 먼지가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다시 여기저기에 붙기를 기다린다.

 

2

추억이 평등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평등해지는 것은 추억이 아니기에. 손을 펴보면 아직도 처음인 듯 꾸물거리는 조약돌 같은 것이 있다. 무덥고 내내 습한 날들, 하양ㅎ고 미지근한 조약돌을 손바닥에서 빙글빙글 돌린다. 죽을 때까지 시간의 공격을 피한다.

 

3

피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감정을 소홀히 함으로써 매일의 생활이 좋아질 것이다. 허공 속에 숨죽인 나무들도 비로소 안정을 되찾는다. 건너편으로 물러서서 이쪽 통로를 터놓은 나무들이여, 너희들은 언제나 대수롭지 않은 잎들을 변함없이 매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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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이수명의 첫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1995)가 문학동네포에지로 새롭게 출간되었다. 1994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한 시인은 지난 26년간 7권의 시집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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