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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 시 한 줄

어느 악기의 고백 -김효선

노바리 2021. 4. 29. 16:27

  매일매일의 숲

 

숲에서 빗소리를 들으면

누군가의 생을 대신 살고 있는 기분이 든다

 

삼백예순 개의 계단을 다시

내려가야 하는 날도 있는 것처럼

생의 가장자리만을 골라 후드득 떨어지는

불운의 물방울들

 

서로의 음악은 숲을 듣지 않아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 일쑤

빛바랜 쪽이 가장 먼저 지운 귀

 

나뭇가지에 속고 지렁이에 움찔거리며

미물에서 느끼는 공포야말로

가장 확실한 숲의 정령

안녕하세요 안녕하-

낯선 인사에 길들지 않는 고개처럼

 

생의 절정이 흰 꽃이라면

초록은 대신 죽어도 좋을 이름

 

오후에 그친다는 비는 저녁 내내 긴

설거지를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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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던가, 신문 출판면을 보다가 왈칵 성이 났다. 창비 책만 몇 권이 소개됐던지. 이게 창비 기관지도 아니고 너무 게으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면을 볼 때마다 요즘 작가들은 창비, 문학동네, 민음사, 문학과지성사에서만 책을 내나 싶은 생각이 든다. 특히 시는 창비와 문지가 아닌 경우를 만나기 힘들다. 문학 담당 ㅊ기자의 소설 소개는 어지간하면 안 읽는다. 거의 스포일러에 가깝다. 시집은 아는 이름들 위주다. 기자들이 좀 수고스럽게 쓰면 좋겠다.

하지만 새로운 시인을 만나려니 막막하다. 도서관 신간코너에 시집이 너무 많다. 도대체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다. 만날 소개되는 시인들 말고, 창비 문지 시선 말고, 이렇게 기준을 정해도 막막하다. 일단 제목으로 거르고, 탁 펼쳐 읽었을 때 느낌이 없으면 덮고, 그러다 우연히 김효선의 시집을 만났다. 열심히, 생각 많이 하고 쓴 시라는 게 보이는 시들. 제주 사는 시인의 시에서 물기 많은 제주가 느껴졌다. 오랜만에 괜찮은 시집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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