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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본문
십 수 년 전 어머니가 큰 병에 걸리신 것이 계기가 되어 죽음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아픈 어머니에 대한 걱정도 걱정이지만 그보다 지켜보는 내 고통을 감당하기 위해 시작한 공부였지요. 어머니가 무사히 회복하신 뒤로도 계속 죽음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당시엔 책이 적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출판사에 다닐 때 노화와 죽음에 관한 책들을 펴냈는데 한두 권을 빼곤 대부분 초판을 소화하기도 어려워서 제가 이런 책을 기획하면 영업부장님의 낯이 어두워지곤 했지요.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한 달에 몇 권씩 죽음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베스트셀러에 오른 <숨결이 바람 될 때>를 비롯해 다양한 책들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으면서 죽음은 출판계의 핫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전에는 죽음에 관심을 갖는 제게 ‘왜 하필 죽음이냐?’고 힐문하던 친구들이 이제는 어떤 책이 좋으냐고 묻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직도 죽음은 사람들에게 불편하고 불쾌한 주제입니다. 일례로 2015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했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출판 관계자들 사이에서 제목이 아쉬운 책으로 첫 손 꼽힙니다. 직설적인 제목이 거부감을 불러일으켜 판매에 악영향을 줬다는 거지요. 하긴 저도 제목 때문에 어른들에게 선물하거나 권할 수 없었다는 이들을 여럿 봤습니다. 죽음에 관심은 있으나 죽음을 직접 거론하는 건 거북해하는 것인데, 그러고 보면 죽음에 대한 시각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껄끄러워할 만큼 죽음을 금기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죽음과 거리를 두고 듣기 좋은 말로 죽음을 꾸미는 태도는 우리에게 닥친 죽음의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며, 나아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사회, 좀 더 인간적인 사회를 이루는 데에 방해가 됩니다. 죽음은 개인의 삶은 물론이요 사회적 삶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법학자 이준일은 죽음의 사회성을 다룬 책 <13가지 죽음>에서, “죽음은 사회적 사건이며 그 사회의 생명존중 문화와 관련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든 사람이 죽는 것은 다 똑같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형제도가 있느냐 없느냐, 안락사를 허용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사회성원들의 삶이 달라지고 죽음의 질이 달라지듯, 사회가 다르면 삶도 죽음도 달라집니다. 심지어 사망을 판단하는 기준도 바뀝니다. ‘뇌사’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망은 장기기증의 필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이런 점에서 죽음은 사회 상태를 반영하며, 한 사회가 인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구성원들을 어떻게 대접하는지 보여주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에선 아직 죽음의 자기결정권이 공론화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막 최소한의 연명치료 중단만을 법제화했을 뿐, 자살은 말할 것도 없고 회복 불가능한 환자들의 죽음을 돕는 안락사에 대해서도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반면 사적으로 의견을 물으면, 늙고 병들었을 때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중단(존엄사)하거나 안락사를 하고 싶다는 이들이 많습니다. 외국인의 조력자살이 가능한 스위스로 죽음여행을 가고 싶다는 이들도 적지 않고요. 문제는 죽음에 침묵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이런 바람이 공개적으로 토론되지 못하고 우리의 죽음이 소수 전문가들 손에 맡겨진다는 겁니다. 그들이 임종기간의 연장에 불과한 연명의료가 마치 병을 치료하는 것인 양, “연명치료를 못해서 죽었다”고 말해도 그 무지나 무책임을 제어할 방법이 전혀 없는 채로 말이지요. 그러니 한국이 청소년도 노인도 홀로 목숨을 끊는 세계 최고의 자살국가가 되고, 억울한 죽음을 맞는 것도 모자라 주검까지 모욕당하는 ‘헬조선’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이 공히 말하기를,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답니다. 그 가르침을 다는 몰라도 한 가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에서만 인간답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 사회는 전문가들이 아니라 당신과 나,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죽을 건가요? 어떻게 살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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