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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광장에서 배우다 본문
지난 토요일 청와대게이트 이후 처음 광화문광장에 나갔습니다. 백만 명이 모인 12일에도 방에 콕 박혀 있었는데 대통령이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을 밀어붙이고 약속했던 검찰 수사마저 거부하는 것을 보니 더는 가만있을 수 없더군요.
듣던 대로 광장은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시대는 절망을 강요하지만 사람들은 신나게 하야가(歌)를 따라 부르며 스스로 희망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지옥철을 방불케 하는 인파에 치이면서도 눈살 한 번 찌푸리지 않는 사람들, 커다란 휴지통을 짊어진 젊은이와 종량제봉투를 들고 다니며 쓰레기를 줍는 어르신, 찬바람 속에서도 의젓하게 연단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어린이와 발랄한 청소년들의 모습은 절로 미소 짓게 했습니다.
하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광장에는 위로조차 건네기 힘든 눈물도 함께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늦장대응으로 세월호에서 외아들을 잃은 어머니, 사망자가 천 명이 넘는데 피해보상도 재발방지 대책도 외면하는 정부 여당 때문에 고통받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가족, 하루아침에 폐쇄된 개성공단으로 모든 것을 잃은 기업인… 그간의 고통을 증언하는 이들을 보며 지난 3년 9개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았는지 새삼 절감했습니다.
중국 작가 펑지차이는 문화대혁명의 비극을 그린 <백 사람의 십년>이란 책에서, “큰 인물들이 아무리 비극적인 일을 겪었다 할지라도 일반 인민들이 겪는 비극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역사는 흔히 권력자들의 다툼과 부침, 성패와 비극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펑지차이의 말처럼, 그들의 비극은 동정과 추앙의 소재가 되고 성공의 상찬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 되는 반면, 일반 인민은 그 와중에서 돌이킬 수도 하소연할 수도 없는 비극을 겪습니다. 특히나 큰 권력을 가진 인물이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공적인 힘을 사적인 복수와 이익을 추구하는 데 사용할 때, 국민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광화문광장의 눈물이 보여준 것처럼 말이지요.
웃음과 눈물로 가득한 그날의 광장은 또한 수많은 스승이 있는 거대한 학교이기도 했습니다. 공자가 이르길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고 했으니, 5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는데 스승이 없을 리 없지요. 그중에서도 제게 따끔한 가르침을 준 스승은 청소년들이었습니다. 솔직히 현장에 나오기 전, 정유라의 부정입학 때문에 청소년들이 거리로 나온다는 언론 보도를 보면서는 심경이 복잡했습니다. 그들의 억울한 심정을 알면서도 한편으론 자신의 손해에만 민감한 게 아닌가 싶었지요.
그런데 그런 제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박근혜 하야 전국 청소년 비상행동’ 대열을 이끄는 트럭에서 한 남학생이 외쳤습니다. “우리는 정유라 하나 때문에 나온 것이 아니다, 지금의 혼란을 틈타 한일군사협정을 체결하려는 정부의 친일행각에 분노해 나왔다.” 놀랐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전하는 말만 듣고 함부로 넘겨짚은 것이 미안하고 창피했습니다. 한데 잇달아 들려온 또랑또랑한 여학생의 목소리는 더 큰 놀람과 부끄러움을 안겨주었습니다.
“어른들은 미래세대인 우리에게 이런 나라를 물려줘서 미안하다고 합니다.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우리 청소년은 미래세대가 아니라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입니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은 청소년을 동등한 주체로 보지 않는 것이며 참정권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30여년 만에 다시 광장을 찾기는 했으나 큰 희망은 없었습니다. 숱한 희생을 치르며 키워온 민주주의가 하루아침에 짓밟히는데도 셈을 앞세우는 정치인들, 사회적 책임은커녕 최소한의 염치도 없는 엘리트들을 보면서 역사의 진보를 의심했지요. 그러나 어설픈 제 지식은 패배에 학습되지 않은 당찬 10대들의 가르침에 산산조각이 났고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저는 아직 배울 것도 많고 할 일도 많은 늙은 미성년이란 것을, 벌써 물러서기에는 갈 길이 참으로 멀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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