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시베리아 원시림에서 다른 삶을 만나다 본문

산책

시베리아 원시림에서 다른 삶을 만나다

노바리 2014. 4. 21. 14:22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 김현국 옮김, <타이가에서의 만남>, 피데스, 2008

 

4월은 책과 관련된 행사가 많다. 12일부터 18일은 50회 도서관주간이고 23일은 유네스코가 정한 책의 날이. 꽃놀이하기 좋은 계절에 웬 책이냐 하겠지만 원래 놀기 좋은 때가 책 읽기도 좋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서 책에 집중이 잘 되는데다가 이맘때 도서관에서 벌이는 행사들을 잘 이용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평소보다 대출권수가 늘어난 걸 이용해 찜해두었던 책과 DVD를 욕심껏 빌리고, 도서관 마당에서 펼치는 책 장터에 내놓을 책도 골라둔다.

 

20여 년 전 시립도서관 옆으로 이사 와 도서관의 쓸모에 눈을 뜬 이래 이제 도서관은 일상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요소가 되었다. 특히 도서관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란! 언론매체의 신간 소개를 챙기고 서점도 둘러보지만 놓치는 책들이 많은데 그럴 때 도서관 신간코너는 꽤 도움이 된다. 얼마 전 발견한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의 <타이가에서의 만남>도 그런 경우다. <데르수 우잘라>를 읽고 아르세니예프의 팬이 되었지만 이 책이 나온 줄은 모르고 있었는데 우연히 신간코너에 꽂힌 것을 보았다. 2008년에 나온 책이 왜 그날 거기 있었는지아무튼 덕분에 <데르수 우잘라>의 감동을 다시 느낄 수 있었으니 기쁠 뿐이다.

 

<타이가에서의 만남>은 우수리 지방과 시호테알린 산맥을 탐사하며 30여 년간 타이가(원시림) 지대를 연구한 아르세니예프의 저술을 러시아 청소년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그림을 넣어 편집한 책이다. 청소년용 발췌본이라 해도 타이가의 위대한 자연과 원주민들에게서 -심지어 동물에게서도- 끝없이 배우는 아르세니예프의 섬세하고 겸손한 시선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특히 그가 담담한 어조로 전하는 타이가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읽다 보면 인간이란 더 많이 욕망하고 쉼 없이 경쟁하는 존재라 여겼던 것이 과연 맞는지 의심이 생긴다.

 

어느 날 아르세니예프는 우데헤족 노인과 사슴 사냥에 나서는데 총을 겨누기만 하면 노인이 소리를 질러 사슴을 놓치고 만다.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자 아르세니예프는 화가 난다. 한데 노인은 오히려 총도 제대로 못 쏜다고 탓하는 게 아닌가. 기막혀 하는 아르세니예프에게 노인이 말한다. 잠자는 동물은 쏘면 안 된다고, 이것은 우레 같이 소리친 뒤 먹잇감을 덮치는 호랑이가 가르쳐준 사냥의 원칙이라고. 그 얘길 들으며 낯을 붉혔을 아르세니예프처럼 나도 이 대목에서 낯을 붉혔다.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눈감았던 크고 작은 불의들에 얼굴이 뜨거웠다.

 

그뿐이 아니다. 에벤크인들을 따라 툰드라 지대를 여행하던 아르세니예프는 걸음이 빠른 그들을 놓치고 헤매다 죽을 뻔한다. 하지만 간신히 에벤크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미안해하기는커녕 어떻게 밤새 그 먼 길을 왔냐고 놀라워한다. 사소한 일에도 토라지기 잘하고 배려를 기대하는 나라면 두고두고 원망했을 일인데, 타이가의 삶에 익숙해진 아르세니예프는 모든 게 잘 끝나서 다행이라며 그들의 무심을 탓하지 않는다.

아르세니예프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지만 책을 읽으면 알게 된다. 이 또한 엄혹한 자연에서 살아가는 원주민들이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킬 수 있다고 믿었듯이 그를 믿었을 뿐이란 것을.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은 어머니처럼 보살펴주되 건강한 청년의 삶은 믿고 맡기는 그들을 보며 깨우친다. 내 삶은 얼마나 비겁하고 얼마나 치사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