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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살아남은 자의 기억 본문
프리모 레비, 이소영 옮김,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프리모 레비의 마지막 저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를 드디어 읽었다. 서경식의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를 통해 이름을 접한 지 7년 만이다. 오래 기다렸으나 설렘은 없었다. 시절 탓이다. 7년 전이라면 수사(修辭)로 받아들였을 표제가 올 봄을 겪으며 생생한 현실이 되었고 은유 없는 현실을 대면하는 것은 괴로웠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라는 수사에 기대어 최소한의 위안이나 변명을 구하는 건 불가능했기에, 피해자와 가해자, 죽은 자와 산 자로 나뉘는 현실을 속수무책 견딜 수밖에 없었다.
허나 어쩌면 시절 탓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프리모 레비는 이 책을 “수사에 맞서기 위해” 썼다고 밝혔다. 아름다운 말들에 가려진 “불가능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 생의 마지막에 이 책을 남긴 그를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 당연하리라. 물론 레비도 “살아가는 데는 어느 정도의 수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수사가 오히려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아름다운 말들 뒤에 숨어 나는 그 말들을 믿었을 뿐 아무것도 몰랐다고,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 누가 죽기를 바란 적도 해를 끼친 적도 없다고 변명하는 이들에게 그는 말한다.
“대다수는 정신적 나태함 때문에, 근시안적 타산 때문에, 어리석음 때문에, 국민적 자부심 때문에 히틀러의 ‘아름다운 말들’을 받아들였고, 거의 대부분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침묵했으며 거의 모두가 비겁했다.”
지난 세월, 숱한 이들이 죽고 다치고 울고 신음하는 세상을 무사히 살아오면서 나는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배가 가라앉고 송전탑이 집 앞에 들어서는 불행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라 여겼다. 그 모든 일들이 벌어지도록 내버려둔 내 자신의 나태와 타산과 무지와 비겁에 대해서는 잊고 싶었고 잊었다.
그러나 레비가 기억을 일깨운다. 망각으로 도피하려는 가해자와 협력자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기억을 깨우는 한편, 살아남은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통해 가혹한 진실을 드러낸다.
“라거(강제수용소)에서 구조된 자들은 최고의 사람들, 선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 메시지의 전달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죽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용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부정하고 싶지만 내 삶의 기억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그리하여 “나보다 더 관대하고 섬세하고 현명하고 쓸모 있고 자격 있는 사람 대신에 살아남았다”는 레비의 고백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되어 나를 부끄럽게 한다. 누군가는 쓸데없는 자학이요 비관주의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레비가 이렇듯 캄캄한 비관을 토로하는 까닭은 한 점의 수사도 없이 우리가 처한 참담한 현실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이웃의 울음에 귀를 막고 눈앞의 위험을 모르쇠 하는 우리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다. 어리석은 인류가 똑같은 잘못을 다시 범하지 않도록 감당하기 힘든 진실을 말했던 사람, 그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이상 비겁해선 안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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