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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전장 같은 사회에서 사람으로 살기 위해 -주간경향 5월 22일 본문
----김동춘, <전쟁정치>, 길, 2013
배가 침몰하고 300명 넘는 목숨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물이 차오르는 선실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 없는 비명과 두 손 모으고 구조를 기다리는 간절한 기도를 보았다. 그 모든 걸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봄날의 제단에 흰 국화꽃을 바치며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 말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5월의 영정, 뒤늦은 사과와 다짐,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그랬으나 바뀐 것도 배운 것도 없었다.
왜 그럴까? 그토록 많은 생명이 그토록 여러 번 기막힌 죽음을 죽었음에도 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을까? 왜 선장과 선원들은 대피하라는 말 한마디 없이 자기들끼리만 도망쳤을까? 왜 해경은 평범한 어민들보다도 구조에 소극적이었을까? 왜 정부는 생존자와 실종자 숫자조차 갈팡질팡하는 극한의 무능을 내버려둔 채 애도와 분노의 목소리에만 귀를 세우는가? 무엇보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데 같은 사람으로 어떻게 그리 무심하고 냉담할 수 있는가?
어쩌다 이런 괴물 같은 인간들이 판치는 괴물 같은 나라가 되어버렸는지, 모르겠다. 누구는 신자유주의 때문이라지만 돌아보면 오래 전에도 그랬다. 거짓말로 국민을 사지에 남겨둔 채 저 혼자 달아나고도 사죄는커녕 살아난 이들을 용공 부역자로 몰아 죽인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줄곧. 결국, 국가란 객관적인 위험을 감소시키는 보호자가 아니라 위험의 생산과 보호의 판매를 동시에 수행하는 범죄조직이라는 찰스 틸리의 신랄한 분석이 맞는 것일까.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부인하기도 어렵다. 육군대장 박정이가 <6․25전쟁과 한국의 국가 건설>(선인, 2013)에서 언급했듯이, 전쟁이 국가를 만들고 국가가 전쟁을 만든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김동춘의 <전쟁정치>는 그렇게 형성된 국가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움직이는지 실상을 보여준다. 그걸 읽으며 알았다. 전쟁정치를 끝장내지 않는 한 이런 참극은 처음 있는 일도, 다시없을 일도 아니란 것을. 오늘의 참사 앞에서 온 나라가 초유의 비극인 것처럼 떠들썩하지만 11년 전 대구 지하철 참사 때도 7년 전 태안 기름유출사고 때도 그랬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과와 재발방지를 외치는 목소리들로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 뒤 대구의 유가족들이 국가를 믿었다가 ‘유골 암매장’ 혐의로 재판을 받고, 태안의 피해자들이 삼성과의 소송에 시달리며 암에 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 그에 대해 말하는 목소리는 없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 세월호 희생자 숫자가 교통사고 사망자보다 적다는 말이 가능한 사회, 의문사한 아들의 사인을 밝히려는 아버지가 “전쟁이 나면 장군도 팡팡 나가떨어져 죽는데 그깟 장교 하나 죽은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는 질책을 받는 사회, 그 전장 같은 사회에서 인간은 숫자일 뿐, 전사자는 불가피하며 '지나친' 애도는 불순하다.
그 사회를 바꿀 방법을 나는 모른다. 단 하나,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는 건 안다. 김동춘이 말했듯 책임(responsibility)이란 피해자에게 가해자, 방조자, 공동체가 응답하는 것이다. 국가의 무능과 방조와 폭력으로 희생된 이들에게 ‘간첩’ ‘종북’ 딱지를 붙이고 보상금으로 책임을 가름하며 침묵을 강요하는 대신, 가해자들을 법적・정치적・사회적으로 처벌하고 희생자와 피해자들을 보듬고 기억하는 책임, 그것이 이 괴물 같은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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