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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아버지에게 죽음을 묻다 본문
지난 주말 오랜만에 부모님댁에 갔다. 어머니는 언니와 쇼핑을 가고 안방엔 아버지 혼자 누워계셨다. 집안이 조용해서였을까, 모처럼 아버지와 이런저련 얘기를 나눴다. 올해 여든아홉인 아버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화상대. 특히 늙고 죽는 일에 관심이 많은 내게 아버지는 가장 좋은 스승이다.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미수를 넘기고 올해 들면서 얼마 안 남았다는 걸 느낀다. 여기저기 아픈 것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몸이 전과는 또 다름을 느낀다. 일테면 자다가 숨이 멈출 때가 가끔 있다. 숨이 멈추니 잠결에도 답답해서 깨는데 아마 이러다 깨지 않으면 자다가 죽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느이 어머니도 그렇고, 자다가 죽으면 복이다, 그보다 좋은 게 어디 있느냐 하지만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사람은 짐승과 달라 살고 죽는 걸 의식하는 존재인데 자다가 죽는 줄도 모르게 죽는 것이 뭐가 좋으냐. 좀 아프더라도 죽음이 어떻게 오는지, 죽는 과정을 고스란히 느끼며 죽어야지.
내가 물었다.
죽을 때 괴롭고 아픈 게 겁나지 않으세요? 요즘 사람들은 그걸 많이 걱정하고 그래서 자다 죽으면 좋다고 하는데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으셨다.
이 정도 살고 이런저런 재미도 보았으면 죽을 때 좀 괴롭기도 해야지. 어떻게 영 안 아프길 바라느냐.
(아버지는 지금이라도 하나님을 믿어 천당에 가라고 전도하는 장로님께, 이 나이까지 이 정도 누리고 살았으면서 죽어서까지 천당에 가기를 바라는 건 욕심이다, 천당이 있으면 거기엔 이승에서 나보다 더 힘들게 산 사람들이 가야지 내가 천당까지 욕심 내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분이다.)
나는 죽는 걸 잘 보고 느껴서 네게 말해주고 싶은데, 문제는 죽을 때가 되면 사람이 기운이 없어 말을 못하더라.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실 때 말씀을 못하고 눈물만 흘리시더구나. 그래서 말을 못하게 됐을 때 어떻게 그걸 알려줄지 그게 고민이다.
(다음번에 아버지와 만나면 그럴 때를 대비한 수신호를 미리 정해둘까 싶다.)
아버지는 또 말씀하셨다.
요즘은 생각이 많다. 거의 잡생각이지. 눈이 침침해지고 어지러워 책을 읽을 수가 없어 그런 것인데, 처음엔 책을 못 읽는 것이 한심했으나 내가 이 나이에 책은 더 읽어 뭐하나 생각하고 말았다. 사람은 그러니까 다 제 편하게 합리화를 하는 것이지.
아무튼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다보면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 잘못한 일, 나쁘게 했던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른다.
이즈음 들어 가끔 내가 끔찍하게 여기는 장면이 보이기도 하고 헛것이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러니 더욱 착하게 살아야 마음이 편하지 않겠느냐.
내가 물었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요? 사후세계란 것이 있을까요?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왜 아버지는 그렇게 열심히 제사를 지내고 성심껏 조상을 모셨나요? 전 아버지가 말씀만 유물론자일 뿐, 영혼을 믿는다고 생각했어요.
아버지는 슬그머니 웃으셨다. 내가 말했다.
그럼 그건 집안의 질서를 위해서 그런 건가요?
그렇지, 살아서는 살아야 하니까. 살기 위해선 필요한 게 있지. 하지만 귀신이 있다거나 영혼이 있다고 생각진 않는다. 모르지, 나는. 있는지 없는지.
죽으면 아무 소용없고, 끝이다. 그걸 전쟁을 겪고 끔찍한 죽음들을 보면서 알았다.
어버이날을 기념하여 부모님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며 또 물었다.
아버지, 저는 요즘 들어 부쩍 죽는 게 무섭고 자다가도 두려울 때가 있어요. 지금 잠시 그런 걸까요, 아님 이런 두려움을 아버지도 느끼시나요?
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잠시 그런거다. 나는 지금 안 그러지. 죽는 게 겁나고 죽기 싫고 그러진 않는다. 그건 걱정마라. 나처럼 이렇게 원대로 살고 나면 죽음이 무섭고 싫고 하진 않는다. 내가 잘 보고 겪어서 알려줄테니 너는 걱정마라.
아버지, 그럼 저는 아버지 뒤만 졸졸 따라갈테니 아버지가 잘 알려주세요.
그래, 내가 가르쳐주마. 걱정말고 따라와라. 하하하.
아버지는 가난한 집에서 일찍 선친을 여의고 밥벌이를 해야 했다. 간신히 초등학교만 나왔지만 나는 아버지보다 지성적인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평생토록 읽고 생각하고 기록하기를 멈추지 않으셨고, 자식들과 격의없이 토론하셨다. 머리가 너무 좋으셔서 자식들이 당신만 못한 걸 답답해하신 것이 자식된 입장에서 가끔 속상하였지만 함께 보낸 세월이 쌓이며 이제는 참 좋은 스승이요 길동무로 느껴질 때가 많다.
책에서도 배울 수 없는 걸 늙은 부모님께 배운다. 이런 큰 복이 어디 있을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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