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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독서탐사기

두번째- 땡큐! 플로베르

노바리 2011. 2. 13. 16:03

----줄리안 번스, <플로베르의 앵무새>, 신재실 옮김, 열린책들


첫 번째 탐사기에서 제인 오스틴의 <엠마>를 읽다가 ‘엠마’라는 이름에 혹해 얼떨결에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를 읽은 사연을 이야기했지만, 이런 의외성이야말로 연쇄독서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연쇄를 부르는 가장 큰 동인의 하나는 역시 작가입니다. 특히 플로베르 같은 작가는 독자를 쉬 놓아주지 않지요.

 

나도 그랬습니다. <마담 보바리>를 두 번이나 읽느라 녹초가 되었음에도 그 책을 덮자마자 바로 그보다 더 두꺼운 <감정교육>과 600쪽이 넘는 플로베르 평전1)을 찾아 읽었으니까요. <마담 보바리>로 워밍업을 했는데도 <감정교육>은 읽기가 쉽지 않았고, 평전은 작가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은 주었지만 작품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품을 깨물면서 계속 읽었으니, 그게 플로베르의 미친 존재감 때문인지 사소한 일에도 끝장을 보려는 내 못된 성격 탓인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플로베르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작가는 아닙니다. 장황하고 쌀쌀맞고 모호한 듯 날카로워서 독자를 자꾸 우두망찰하게 만들지요. 하지만 플로베르 같은 작가를 두고 좋네 싫네 하는 건 쓸데없는 짓입니다. 섣부른 분별을 내세우기엔 그가 보여준 길이 너무 멀기 때문이니, 우선은 그 길을 조심스레 따라가는 게 순서라 나는 그리 믿습니다.

 

한데 작가에 대한 이런 경외감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 작품을 섭렵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은 <감정교육>을 끝으로 접고 말았습니다. 잡다한 에피소드들이 시간순으로 꼼꼼히 나열된 <감정교육>을 읽느라 남은 기력을 몽땅 소진한데다, <마담 보바리>에 이어 또 한 번 지독한 공허를 맛보고 나니 더는 그의 작품을 읽을 엄두가 나지 않더군요.

 

거짓이나 환상이 아니라 진실을 읽고 싶다고 늘 생각해왔지만 막상 출구 하나 없는 삶의 진상을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대중은 자신들의 환상에 아첨하는 작품을 원한다”는 플로베르의 말처럼, 나 역시 환상에 아첨하여 내 삶을 크게 흔들지 않는 독서를 해왔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마담 보바리>를 읽고 소설을 쓴다는 것에 대해 돌아보며 작가로서의 자괴감을 느꼈다면, <감정교육>을 읽은 뒤에는 소설 독자로서 자괴감까지 느끼게 된 셈이지요.

 

옛날 소설 두 편 읽고 너무 과장하는 것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닌 듯합니다. 플로베르에 홀렸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한눈에 보여주는 또렷한 증거가 있으니까요. 바로 영국작가 줄리안 번스가 쓴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그것입니다. 이 책은 편집자로 칼럼니스트로 소설가로 두루 능력을 발휘해온 줄리안 번스가 쓴 소설로, 발표된 후 제프리 페이버상과 메디치상, E.M.포스터상 등을 수상한 역작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책이 에세이에 수여되는 구텐베르크상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의 작품이 소설상과 에세이상을 동시에 받은 셈인데, 도대체 정체가 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지요. 그래서 읽게 된 <플로베르의 앵무새>, 플로베르가 인연이 되어 만난 또 하나의 경이입니다.


“친구의 전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앙갚음하듯 써야 한다.”

책장을 펼치면 사뭇 결연한 제사(題詞)가 눈에 들어옵니다. 플로베르가 에르네스트 페도에게 보낸 편지글이라는데, 어떤 연유에서 그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줄리안 번스가 왜 이 말을 제사로 내세웠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 “앙갚음하듯” 독한 마음가짐이 아니었다면, 한 편의 기발한 소설이자 놀랍게 성실하고 독창적인 이 플로베르 전기를 완성할 수 없었을 테니까요.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은퇴한 의사이며 아마추어 플로베르 연구가인 브레이스웨이트가 주인공인 소설입니다. 소설답게 주인공의 죽은 아내의 사인(死因)을 둘러싼 스릴러적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플로베르와 여자 가정교사의 관계에 대한 흥미진진한 추리로 독자를 들뜨게도 하지만, 딱 거기까지. 소설이란 장르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읽는 것은 오히려 독서에 방해가 될 뿐입니다.

 

연보, 평론, 사전, 심지어 시험문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글쓰기가 동원된 책의 형식은 전통적인 소설과는 거리가 멉니다. 더구나 내용적으로도 브레이스웨이트라는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소설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플로베르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그가 남긴 글을 읽으며 그의 생애를 복원하는 것뿐이니, 말만 소설이지 사실은 플로베르 평전이라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평전도 그냥 평전이 아니라 아주 자유롭고 독특한 방식으로 쓴 뛰어난 평전이지요. 그럼에도 책을 읽고 나서는 평전이 아니라 소설이란 생각이 드니….

 

시작은 앵무새입니다. 브레이스웨이트는 플로베르가 태어나 자란 루앙을 찾았다가 시립병원 박물관에서 작가가 소설 <순박한 마음>을 쓸 때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는 앵무새를 봅니다. 작가의 고향을 찾고 그의 흔적을 더듬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작가의 실상을 궁금해 하는 데에 스스로 뜨악해하던 브레이스웨이트였지만, 작가에게 영감을 준 초록색 앵무새 룰루를 보는 순간 그는 플로베르를 오래 알고 지낸 듯 강한 유대감과 감동을 느낍니다.    

 

하지만 루앙을 떠나 플로베르가 반평생을 넘게 살며 작품 활동을 했던 크루아세에 갔을 때, 그는 또 한 마리의 앵무새 룰루를 만나게 됩니다. 작가가 살았던 별채에 작가의 다른 유품들과 함께 보관된 이 앵무새는 브레이스웨이트에게 의심과 당혹감을 안겨줍니다. 루앙의 앵무새가 작가를 만난 듯한 실감을 주었다면, 크루아세의 앵무새는 그 모든 감동을 무화시키며 앵무새의 실체에 대해서도 플로베르의 실체에 대해서도 오리무중으로 만들어 버리지요. 혼란에 빠진 브레이스웨이트는 학자들과 편집자들에게, 룰루를 그린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플로베르의 책상 위에 있었던 진짜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어느 쪽입니까? 

 

전기 겸 비평 겸 소설이라는 이 전대미문의 작품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어느 것이 진짜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라는 질문이지요. 처음에 이 질문은 한 호사가의 하릴없는 호기심처럼 보입니다. 두 마리의 박제 앵무새 중 진짜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어느 것이냐니! 그게 그렇게 긴 시간과 노력을 투여할 만큼, 아니 한 편의 장편소설의 시발이 될 만큼 중요한 일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더구나 플로베르 잡학사전도 아닌데 앵무새를 찾는다면서 플로베르에 관한 온갖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마땅치 않습니다.

 

하지만 플로베르에 관한 서로 다른 연보들과 증언들, 그리고 그 속에 한숨처럼 흘린 브레이스웨이트의 죽은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읽노라면, 이 모두가 무엇이 진짜인가를 묻는 것이며 형상 속에 숨은 진실을, 진짜 모습을 만나려는 몸부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소설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 찾기는 독자 브레이스웨이트가 작가 플로베르의 실체를 탐색하는 여정이면서 동시에, 죽은 아내의 진실에 닿고 싶은 인간 브레이스웨이트의 열망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무엇이 진짜인가라는 질문은 작품과 작가에 대한 질문이자 실제 삶에 대한 질문인 셈이지요.

 

그런데 정작 질문을 던지고 좇는 브레이스웨이트는 이 질문에 대해 회의적입니다. 플로베르의 고향을 찾고 그의 동상과 박물관을 둘러보고 그가 남긴 일기와 편지는 물론 그의 주위 사람들이 남긴 글까지 모조리 섭렵하면서도, 브레이스웨이트는 그런 노력들이 작가의 진면목을 밝혀줄 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에 관해 사람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려는 것이 부르주아적 유혹인데 나는 항상 그것에 지지 않으려 했다”고 자부했던 플로베르, “자신의 작품에서 저자는 우주에 존재하는 신처럼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어느 곳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공언했던 플로베르를 떠올리며, ‘진짜 플로베르’를 묻는 것의 무의미함을 되새기지요.

 

이 책에 실린 두 개의 연보가 보여주듯이, 플로베르의 삶은 하나이지만 그 삶은 득의양양한 성취로 기억될 수도 있고 고통스런 좌절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인가는 영원히 오리무중. 그러니 결국 남는 것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주관적 시선이 아니냐고 브레이스웨이트는 회의합니다. 진짜 삶, 진짜 인간,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 설령 존재한다 해도 인간이 그것을 알고 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 그는 회의적입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뒤 그가 아내의 자취를 찾아나서는 대신 오래 전에 죽은 외국작가의 흔적을 더듬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그는 엠마 보바리처럼 부정했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로 의사의 아내로 안락한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그 일상에 만족하지 못했던 아내, 그리하여 끝내 죽음을 택했던 아내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 삶의 일부였으나 그 삶의 이방인이었던 그에게, 아내는 해독불가의 텍스트이며 남편으로서도 독자로서도 무력하기만한 자신을 비추는 거울입니다.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작가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책은 그녀가 이러저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녀가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


삶의 오리무중을 감당하기 어려워 책에 의지했건만 그 책이 감당하는 것은 타인의 삶뿐이라는 것, 긴 여정 끝에 브레이스웨이트가 만난 것은 이처럼 가혹한 진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플로베르에 대한 탁월한 독법을 보여준 작가 줄리안 번스가 도달한 씁쓸한 진실이기도 합니다. 작가이기 전에 누구보다 성실한 독자인 번스는 플로베르에 관한 이 길고 꼼꼼한 독서를 마무리하며 고백합니다. 삶을 뒤로 물리면서까지 죽도록 읽었지만 그 독서는 내 삶이 아닌 타인의 삶을 보여줄 뿐이며 아무리 성실하고 열정적인 독서도 독자를 구원할 수 없다고, 결국 책은 책일 뿐 삶이 아니라고 말이지요.  

 

번스는 소설과 평전, 픽션과 논픽션, 작가와 독자를 오가는 독특한 글쓰기를 통해 책과 삶의 경계가 흐릿해진 시대, 씌어진 삶과 실제의 삶이 뒤섞이고 해석과 사실이 자리바꿈을 하며 모든 것이 텍스트에 자리를 내준 세상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집니다. ‘진짜’ 플로베르의 앵무새는 어디 있나요?

 

착종과 혼용의 세상에서 진짜를 묻는 것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번스의 질문은, 진짜 삶을 의심하며 책과 삶의 경계를 무너뜨린 뒤에도 혹시나 책갈피에 삶이 숨어 있지 않은지 돌아보는 것이 인간임을 드러냅니다. 작가가 쓴 책에 만족하지 않고 책을 쓴 작가의 흔적에 연연하는 독자, 죽도록 책을 읽고도 결국은 책이 아닌 삶을 그리워하는 존재, 그게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지독한 아이러니인데, 어쩌면 그래서 번스는 수많은 작가들 중 플로베르를 끌어들였는지도 모릅니다. 플로베르야말로 아이러니의 달인, 아이러니가 아니고는 생의 진창을 설명할 길이 없다고 믿었던 작가이니까요. 

 

플로베르의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쓰지 못하는 내 자신이 절망스러웠습니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읽으면서 그렇게 읽지도 못하는 내 자신이 또 절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책장을 덮은 지금 희망이 생깁니다. 잘 쓰지도 잘 읽지도 못하지만 결국 중요한 건 사는 것, 나는 열심히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