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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연쇄독서 첫번째- 그 여자의 이름으로 본문
* 올해부터 <기획회의>에 연재를 시작했다. 고민하다가 '연쇄독서기'를 쓰기로 했다. 일종의 독서 꼬리물기인데, 해보니 쉽지 않다. 그래도 쉽지 않은 일에 흥미가 생긴다.
귀스타브 플로베르, 김화영 옮김, <마담 보바리>, 민음사
술은 술을 부른다고들 합니다. 처음엔 내가 술을 먹지만 이윽고 내 안의 술이 술을 불러 나를 먹는다고, 그러니 조심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맞는 말이지만, 제가 저를 부르는 것이 어디 술뿐이겠습니까? 잠은 잠을 부르고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으며 고기도 먹어본 놈이 잘 먹는다고 하지요. 심지어는 책도 그렇습니다. 이 책이 저 책을 부르고 한 권의 책이 숱한 책들의 도화선이 되는 일, 그리하여 책 없이도 어엿하던 이가 책에 들려 세상을 잊는 일이 드물지 않습니다.
나 또한 내 안에 질문이 있을 때 그 질문이 부르는 책을 읽기로 원칙을 삼고는 있지만, 실은 툭하면 책에 취해 책이 부르는 책을 읽는 ‘연쇄독서’에 탐닉하곤 합니다. 한 책의 꽁무니를 좇다가 뜻밖의 책을 만나고, 그 책의 뒤를 캐다가 또 다른 책의 앞섶을 들추는 재미가 워낙 쏠쏠한 탓이지요.
사실 이런 연쇄독서는 자신의 질문도 세상의 문제도 잊은 것이라 민망하긴 합니다. 하지만 남들이 읽었다니까 읽는 통속, 읽은 것으로 자랑을 삼는 허영, 읽어야 한다니 읽는 소심의 독서에 비해 크게 허물할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독서마저 이력서를 만들어 관리하겠다는 시대에, 목적도 정처도 없이 책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그 순수성은 귀하다 할 만하지요.
그런데 목적도 정처도 야무진 계산속도 없는 연쇄독서라 해서 연쇄가 일어나는 까닭조차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을 읽고 그 책과 저자에 관한 여러 참고문헌들을 찾아 읽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연쇄독서는 물론이요, 연쇄성이 이처럼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해도 어떤 책이 빌미가 되어 다음 책읽기로 이어질 때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는 법. 무의식도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마당에 연쇄독서의 구조가 없을 리 없으니, 그간의 내 경험에 따르면 연쇄가 일어나는 속사정은 다음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작가에서 촉발되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은 독자가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에 매료되어 단지 제목에 ‘프루스트’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알랭 드 보통의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을 읽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입니다.
아, 물론 호감이 아니라 작가에 대한 비호감이 연쇄를 자극할 수도 있지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이렇게 지루하고 수다스러운 작품을 왜 걸작이라 하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던 차에 우연히 보통의 책을 발견하고 ‘이건 또 뭐야?’ 하는 순전히 부정적 호기심에서 책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읽은 보통의 책이 마음에 들어서 그의 다른 책을 읽게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책으로 이어질 때, 프루스트라는 작가가 첫 사슬이 된 연쇄독서가 이루어진 셈이지요.
둘째, 한 책이 다른 책들의 모태가 되어 창작의 연쇄와 함께 독서의 연쇄까지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대개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 이런 모서(母書)가 되기 쉬운데, 가령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작품의 중심축으로 등장하는 레온 드 빈터의 <호프만의 허기> 같은 소설이 이런 예이지요. 이때 독서는 <에티카>→ <호프만의 허기>로, 혹은 <호프만의 허기>→ <에티카>로 양쪽 다 가능하지만, 아무래도 <호프만의 허기>→ <에티카>로 이어지는 일이 더 많을 듯합니다.
나 역시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대해서 얘기는 자주 들었지만 그 어려운 철학책을 어떻게 읽나 싶어 감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호프만의 허기>에서 주인공이 끊임없이 뭔가를 먹어가며 이 책을 읽는 걸 보고 궁금하기도 하고, 뭘 먹으면서 읽을 정도의 책이라면 나도! 하는 용기도 생겨서 감히 도전해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상당히 바람직한 연쇄였다고 생각합니다.
셋째, 주제나 주제어(키워드)의 유사성에 따른 연쇄독서를 들 수 있습니다. 관심이 있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책들을 섭렵하는 꼬리물기는 학위논문을 쓴다든가 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뜻밖의 책을 만나는 의외성의 재미는 없지만 가장 전통적인 의미의 연쇄독서라고 할 수 있지요.
그에 비해 주제어에서 비롯된 꼬리물기는 연쇄성이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연쇄독서의 가장 대중적이고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녀의 연쇄독서탐사기’라는 이 글을 읽다가 문득 ‘마녀’에 관심이 동해서,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럼의 마녀들>과 카를로 긴즈부르그의 역사책 <마녀와 베난단티의 밤의 전투>처럼 마녀가 제목에 등장하는 책들을 섭렵하고, 나아가 아주 참신한 마녀가 나오는 미하일 불가코프의 소설 <거장과 마르가리타>까지 찾아 읽는 것이 바로 이런 예이지요.
연쇄독서의 마지막 네 번째 유형은, 작품의 캐릭터(인물)에서 촉발된 독서입니다. 캐릭터가 책 쓰기와 함께 책읽기를 추동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는 박태원의 중편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오는 ‘구보씨’입니다. 박태원의 구보씨는 최인훈, 주인석 같은 소설가에 의해 여러 차례 다시 살아났을 뿐 아니라, 건축학자 조이담, 사진작가 이경민에 의해 근대 도시민의 원형으로 재탄생한 한국문화사의 대표 캐릭터입니다.1) 당연히 독자 입장에선 도대체 구보씨의 무엇이 그리 매력적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고, 그래서 박태원의 구보씨로부터 최인훈의 구보씨로, 주인석의 구보씨로, 또 조이담의 구보씨로까지 목록을 늘려가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캐릭터가 연쇄독서를 부르는 경우입니다.
독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데는 이처럼 작가에서 책으로, 책에서 책으로, 주제(어)에서 책으로, 그리고 인물에서 책으로 이어지는 연쇄성이 작용합니다. 별 생각 없이 닥치는 대로 읽는 것처럼 보이는 독서목록들도 사실 작정하고 따지고 들어가면 그 안에 이런 식의 연쇄성이 숨어 있기 십상입니다.
물론 이 네 가지 유형에 포함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조금은 별스럽다 싶은 요소들이 이어읽기를 자극하기도 합니다. 문체나 분위기에 홀려서 비슷한 느낌의 책들을 계속 찾기도 하고, 작품의 배경이 된 사건이나 공간이 똑같다는 이유만으로 분야를 넘나든 독서를 하기도 하지요. 심지어는 작가의 병력(病歷) 따위에 꽂혀서 같은 병을 앓았던 작가들을 죽 이어 읽을 수도 있습니다. 일테면 유성룡→ 김유정→ 나쓰메 소세키→ 존 파울즈 식으로 말이지요. (동서고금을 망라한 이들 작가를 일련의 화살표로 묶는 문제의 질병이 뭐냐고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들추는 것 같아 망설여지는데…… 음, 치질입니다.)
아무튼 이런 식으로 도처에서 연쇄가 일어난다는 걸 고려하면, 이 ‘연쇄독서탐사기’의 첫 사슬이 제인 오스틴의 <엠마>에서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로 이어지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 둘을 잇는 연쇄의 빌미는, 좀 유치하지만, 여주인공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지난여름이었습니다. 엠마 우드하우스가 주인공인 오스틴의 <엠마>를 읽다보니 어느 순간 또 한 명의 유명한 엠마, 엠마 보바리가 떠오르더군요. 읽은 적은 없지만 플로베르의 유명한 소설 <마담 보바리>의 여주인공 이름이 엠마라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고,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플로베르의 엠마도 오스틴의 엠마처럼 정이 안 가는 비호감 캐릭터인지 궁금하고, 비슷한 시대에 영국 여자가 창조한 엠마와 프랑스 남자가 빚어낸 엠마가 얼마나 닮았고 얼마나 다른지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마담 보바리>. 하지만 첫 장을 넘기는 순간부터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졌던 것이 후회되더군요. 나는 원래 장황한 세부묘사를 싫어하지만 이 정도 유명한 고전을 읽으면서 내 취향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둘째 쪽에서 “그것은 챙 없는 털모자, 샵스카형 군대 모자, 빵모자, 챙 달린 수달피 모자, 무명 보닛 모자의 온갖 요소들이 한데 섞인 혼합식 모자의 한 유형, 요컨대 어떤 멍청한 사람의 얼굴처럼 그 말없는 추악함이 표현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는 그런 한심한 물건의 하나였다.”로 시작된 모자에 대한 묘사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페이지를 넘겨가며 장장 12줄에 걸쳐 계속되는 데는 기가 막히다 못해 부아가 날 지경이었습니다.
독서를 불편하게 한 것은 진 빼는 묘사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설의 도입부에선 “우리가 자습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려니까……”라 하여 ‘우리’를 화자로 내세우더니, 그 지긋지긋한 모자 이야기가 끝날 즈음부터 ‘우리’는 사라지고 3인칭 작가 시점으로 바뀌는 것도 요령부득이었습니다. 뭐 이래? 하다가 그냥 마음을 비우기로 했습니다. 1856년에 발표되었으니 150년도 더 된 소설인데 그만한 결점도 없겠느냐고 생각하기로 했지요.
그것이 결점이 아니라 작가의 치밀한 계산이며 의도라고 여기게 된 것은 제1부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100쪽쯤 읽고나니 플로베르의 어법에 익숙해지면서, 단 한 문장도 공연히 썼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뭐 이래?’ 하던 불만도 사라졌지요. 하지만 독서는 여전히 힘들었고, 작품에 대한 이물감이랄까 거리감은 좀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작가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은데 책을 덮기는 싫고…… 플로베르가 이 소설을 쓰면서 “이 빌어먹을 보바리 때문에 나는 죽을 지경이다.”라고 하소연했다더니, 읽는 나 역시 빌어먹을 보바리 때문에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래도 끝까지 버텨서 마침내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 장황하던 묘사들은 다 어디 가고 불과 몇 쪽 만에 샤를르 보바리의 최후부터 그 딸의 소식까지 일사천리로 전하더니 피날레는 -전혀 눈여겨보지도 않았던- 약사 오메가 장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오메)는 이제 막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이 마지막 문장 앞에서 깨달았습니다. 잘못 읽었구나. 그리고 작품해설에서 내가 대충 건너뛴 농사공진회 장면을 쓰기 위해 플로베르가 6개월이나 고투했으며 그만큼 그 대목을 자랑스러워했다는 이야기를 읽으며 다시 한 번 깨달았습니다. 다시 읽어야겠구나.
500쪽이 넘는 소설책을 잇달아 두 번 -문제의 농사공진회 장면은 무려 4번이나- 읽은 것은 <마담 보바리>가 처음입니다. 덕분에 고전을 시큰둥해하던 그간의 건방진 시선을 교정한 것은 다행이지만, 동시에, 내가 소설을 쓰겠다고 나서도 되나 하는 새삼스런 회의에 빠지게 된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물론 이런 회의가 처음도 아니요 회의를 부추긴 작품이 <마담 보바리> 하나만도 아니지만, 작가의 재능이 아니라 작가의 글 쓰는 태도 때문에 주눅 들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플로베르의 글쓰기는 지독합니다. 칼보다 예리한 그의 펜 끝에서 바로보기 민망한 인간의 속내가 드러나고 추악한 현실이 까발려집니다.
책에서 읽은 낭만적 사랑에 눈멀어 인생을 망치는 엠마 보바리부터, 아내와 정부가 은밀한 시선을 나누는 옆에서 태평하게 졸고 있는 샤를르, 뻔뻔하게 제 욕망을 채우는 정부(情夫) 레옹과 로돌프, 엠마의 허영을 부추겨 한 집안을 파멸로 이끄는 뢰르, 진보의 기수를 자처하며 뒤로는 누구보다 잇속을 챙기는 오메까지,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어리석고 천박하고 탐욕스러워 읽는 이의 혐오감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작가는 동정도 훈계도 하지 않으니 독자는 한 줌의 카타르시스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과 내가 똑같은 인간이며 그들의 허물을 비웃을 자격이 내겐 없다는 생각만 듭니다. 그리하여 깊은 혐오와 절망 속에서 독서는 끝납니다. 아무런 만족감도 희열도 없는 독서, 플로베르는 삶이 그러한 한 소설도 책 읽기도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독자보다 먼저 그 자신이 이런 절망을 감당합니다.
작가로 살겠다고 나선 내게 자신의 글쓰기에 이토록 철저한 작가가 있었다는 것은 기쁨이되 또한 좌절입니다. 아, 삶도 글도 왜 이리 호락호락하지 않은지……. 덮은 책장 위로 검게 엠마의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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