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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독서탐사기

연쇄 ⑤ 나는 나를 벗할 뿐 남을 바라지 않노라

노바리 2011. 4. 16. 11:00

김성남, <허난설헌>, 동문선, 2003

박희병, <나는 골목길 부처다>, 돌베개, 2010


다섯 번째 연쇄를 시작하기 전에 이제까지 어떤 책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졌는지 잠시 돌아보지요. 독후감을 쓰지는 않았지만 발단은 제인 오스틴의 <엠마>로, 거기서 <마담 보바리>→ <플로베르의 앵무새>→ <스픽스의 앵무새>→ <사라져가는 목소리들>로 이어져왔습니다. 연쇄가 일어난 속사정을 본다면, 캐릭터 연쇄→ 작가 연쇄→ 주제(어) 연쇄로 이어진 셈이고요. 연재를 시작할 때 연쇄독서의 유형을 작가․책․인물(캐릭터)․주제(어)의 4가지로 나누었는데, 대충 그에 부합하는 연쇄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이번 연쇄는 좀 다릅니다. 선명한 인과성을 제시하기는 힘든, 분위기의 연쇄 혹은 제목이 환기(喚起)한 연쇄랄까요. 사실 사멸해가는 언어의 보존과 언어생태계의 회복을 주장한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을 소개하면서 처음 염두에 둔 책은 사라진 고대 언어를 탐구한 앤드루 로빈슨의 <로스트 랭귀지>였습니다. 유사한 주제를 다룬 책이니 누가 봐도 무난한 연쇄이지만 비슷한 노래를 이어 부르는 것 같아 신명이 안 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망설이고 있는데 자꾸 머릿속에서 허난설헌이란 이름이 맴돌더군요. 뜬금없다고요? 처음엔 나도 그랬습니다.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 왜 내 속에서 허난설헌이란 이름을 부르는지 이상했습니다. 한데 가만 생각하니 ‘죽은 언어’와 ‘죽은 작가’ 사이에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스물일곱에 스스로 자신의 작품을 불사르고 죽은 난설헌이야말로 ‘사라져가는 목소리’의 위태로움을 대변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노래할 목소리도 재주도 다 가졌지만 노래할 무대를 갖지 못한 채 침묵 속에서 사라진 사람이니까요.

 

그렇게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 허난설헌으로 이어질 즈음, 신문의 신간소개에서 <나는 골목길 부처다>라는 책을 보았습니다. ‘이언진 평전’이라는 부제가 붙은 그 책의 서평을 읽어보니 흥미롭게도 허난설헌(1563-1589)보다 한참 뒷사람인 이언진(1740-1766)도 스물일곱에 자신의 글을 모두 태우고 죽었더군요. 더구나 그 역시 난설헌처럼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어엿한 대접을 못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불우한 공통점에 마음이 흔들려서 결정한 다섯 번째 연쇄독서, 바로 김성남의 <허난설헌>과 박희병의 <나는 골목길 부처다>입니다.


허난설헌(許蘭雪軒)에 관한 책은 평전, 번역시집, 연구서, 소설까지 다종다양합니다만, 그 중 내가 고른 것은 그녀의 문학세계를 살뜰하게 소개한 김성남의 책입니다. 난설헌이 살았던 시대에도 그랬지만, 그녀를 이야기할 때는 대개 문학적인 평가보다 그 비극적 삶에 대한 공명이나 비판이 앞서곤 합니다. 솔직히 내가 그녀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것도 불행한 결혼생활 끝에 요절한 여류시인이라는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김성남의 책은 불우한 운명만이 아니라 시작(詩作)에 초점을 맞추어, 그 생애로 갈음할 수 없는 빼어난 문학적 성취를 조명합니다. 특히 이 책에서 눈에 띄는 것은, 난설헌의 시세계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함에도 이제껏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유선시(遊仙詩)를 꼼꼼히 해석한 부분입니다. 유선시는 난설헌이 심취했던 도교적 세계관이 한껏 드러난 시편들인데, 도교가 난설헌뿐 아니라 동생 허균의 사상에서 갖는 의미를 고려할 때 김성남의 작업은 상당한 의의를 가집니다. 조선의 도교사상을 다룬 책들이 부족한 현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지요.

 

유선(遊仙)이란 속세를 벗어나 선계에서 노니는 것으로, 중국의 위진 시대부터 시작되어 유행한 전통적 시제(詩題)입니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유선시를 쓴 이는 중국과 조선을 통틀어 난설헌이 유일합니다. 그녀는 대다수 여성시인들이 규방에서 이를 소재로 시를 쓸 때 규방을 훌쩍 넘어 신선의 세계로 날아올랐고, 무려 87편이나 되는 유선시를 남겼습니다. 누구는 현실과 동떨어진 선계(仙界)를 노래했으니 결국 현실도피가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유선시는 금기와 억압으로 가득한 조선사회에서 자신의 뜻을 말하기 위한 저항의 은유요 전복의 상상이었습니다.   

 

김성남에 따르면 난설헌의 유선시 87편의 주인공은 모두 여신들입니다. 최고 여신 서왕모, 남편 몰래 불사약을 먹은 달의 여신 항아, 선비에게 먼저 구애한 상원부인, 은하계 여신 강궐부인, 시에 능한 서왕모의 시녀 허비경까지, 난설헌은 풍부한 도교 지식을 바탕으로 다양한 여신들을 등장시켜 자신의 꿈을 펼칩니다. 그의 시에서 여신들은 마음에 드는 남성에게 직접 구애하고, 복숭아가 익은 기념으로 즐거운 술판을 벌이고, 한가한 봄날 함께 시를 짓고 경전을 읽습니다. 당시 어느 누구도 -남성은 물론 여성조차- 상상하지 못한 자유분방하고 지성적인 여인의 모습이지요. 난설헌은 이처럼 선계와 신이라는 은유를 통해, 답답한 규방을 넘어 너른 세상으로 나아가고픈 자신의 꿈을 언어로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루어질 수도, 아니, 함께 나눌 수도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녀가 죽고 백 수십 년이 지난 뒤, 당대 최고의 문장가요 실학의 기수였던 박지원은 이렇게 말합니다.

“규중 여인이 시를 짓는다는 것이 본디 좋은 일은 아니나 이름이 중국에까지 퍼졌으니 대단히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인들은 이름이나 자(字)가 본국에서 나타난 이를 찾아볼 수 없으니, 난설헌 호 하나만으로도 과분하다! 하물며 이름이 경번으로 잘못 알려져 여기저기 기록되어 있으니 천년에도 씻기 어려운 일이다. 후에 재능 있는 여자들이 이를 밝혀 경계의 거울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 최초로 지구 자전설을 주창했을 만큼 열린 사상가였던 홍대용 역시 난설헌을 거론하는 중국 학자들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자가)시로 명성을 얻는다 해도 이는 결코 바른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조선에서는 나름 선각자로 꼽히던 18세기 지식인들이 이럴 때 난설헌이 살았던 16세기 사회가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이 가겠지요.

 

다행히 그녀에게는 시작을 독려하고 그 꿈에 공감한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오빠 허봉과 그녀의 시 2백여 편을 외워 남긴 동생 허균이 그들입니다. 특히, 아끼던 두보의 시집 <두율(杜律)>을 건네며, “내가 권하는 깊은 뜻을 저버리지 않아 두보의 소리가 누이의 손에서 다시 나오기를 바랄 뿐”이라고 격려했던 허봉은 그녀의 재능을 알아준 지음(知音)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벗이요 의지였던 오빠가 유배 끝에 객사하고, 설상가상 사랑하는 두 아이와 뱃속의 자식마저 세상을 뜨면서 난설헌은 삶의 희망을 잃습니다.


오동나무 한 그루가 역양에서 자라나

차가운 음지에서 몇 년을 견디었던가.

다행히 귀한 장인을 만나

베어져 거문고로 만들어졌다오.

거문고로 만들어져 한 곡조를 타보았지만

세상에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

그래서 광릉산의 노래가

끝내 전해지지 못했는가 보오.(‘견흥遣興’)

 

세상에 자신도 자신의 시도 알아주는 이가 없다는 절대 고독 속에서 그녀는 수백 편의 시를 불태우고 죽음을 맞습니다. 일곱 살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을 썼다는 전설이 조선은 물론 중국에도 전할 만큼 천재적인 문재(文才)를 보였던 시인, 여자는 이름도 없던 시절 스스로 이름과 자, 호를 붙일 만큼 당찬 기개를 가졌던 여성은, 그렇게 조선 땅에 여자로 태어난 한을 품은 채 완고한 시대에 무릎이 꺾였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배반당한 천재는 허난설헌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는 우상 하나는 해탕 一虞裳一蟹湯

나는 나를 벗하지 남을 벗하지 않는다. 我友我不友人

시인으론 이백과 동성 詞客供奉同姓

그림으론 왕유의 후신. 畵師摩詰後身


난설헌이 죽은 지 160여 년 뒤, 영조 시대 역관시인 이언진(李彦瑱)이 쓴 6언시입니다. 우상은 그의 자고 해탕은 별호이니 모두 그 자신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한 삶, 시인은 그래도 좋다고, 남이야 뭐라던 나는 이백과 어깨를 겨룰 시인이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이백과 왕유를 끌어오는 기개 뒤에는, 방안에서 홀로 자고자대(自高自大 스스로 높고 위대하다고 여김)하는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숨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반쪽 양반인 서얼도 차별을 받는 조선 사회에서 중인이 문장을 해봐야 인정은커녕 비웃음을 살 뿐이었지요. 사실 생전에 이언진의 학식과 문장을 인정한 것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이었습니다. 1763년 근 1년간 조선통신사의 통역관으로 일본에 갔던 그는 현지에서 주요 문사들과 필담을 나누고 시문을 지으며 문명(文名)을 날렸습니다. 훗날 그의 전기를 쓴 박지원에 따르면, 당시 이언진이 일본인에게 써준 시가 귀국할 무렵 벌써 일본에서 책으로 출간될 만큼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의 활약상은 조선에까지 전해져, 세도가 김조순이 “해가 저물기 전에 천 개의 부채에 시를 적고 5백 수의 율시를 짓고, 자기가 지은 시를 하나도 착오 없이 외자, 일본인들은 경탄하여 혀를 내두르면서 신으로 여겼다. 이에 이언진의 이름이 일시에 유명해졌다”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그는 여전히 세상의 인정을 받지 못한 한미한 중인일 뿐이었습니다. 마치 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문사들의 입에 오르내렸음에도 조선에서는 끝내 그를 인정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지요. 

 

귀국한 이듬해, 이언진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히는 박지원에게 자신의 글을 보냅니다. 세상과 소통하고픈 열망, 다른 이는 몰라도 박지원은 자신을 알아줄 거라는 기대에서 나온 행동이었지만 돌아온 대답은 “잗다랗기에 진기할 게 없다”1)는 혹평이었습니다. 이언진은 큰 충격을 받았고, 얼마 뒤 오랜 병고를 이기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뒷날 박지원은 “나는 속으로 우상의 재주를 남달리 아꼈다”고 술회했지만, 고독 속에서 자신의 작품을 불태우고 죽은 시인에겐 그저 부질없는 자기변명일 뿐이겠지요.

 

그러나 난설헌에게 형제들이 있었던 것처럼 이언진에게도 그를 알아주는 지음이 있었습니다. 실학의 대부 성호 이익의 조카인 이용휴가 바로 그입니다. 이용휴는 서른 살이나 어리고 신분도 낮은 이언진을 기꺼이 제자이자 벗으로 삼았으며, “이언진은 종이에 붓을 대기만 하면 세상에 전할 만한 작품이 되었다. 하지만 세상에 알려지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그를 알아줄 만한 사람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 남에게 이기기를 구하지 않았으니 이길 상대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 그 천재성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나는 골목길 부처다>의 필자 박희병은 특히 이용휴를 통해 이언진이 중국의 이단사상가 이탁오를 접한 것에 큰 의의를 둡니다. 그에 따르면, 당시 조선에서 이탁오 사상을 수용한 지식인은 허균과 이용휴가 유일한데, 바로 이 이탁오를 이언진이 배우면서 미천한 신분적 제약을 넘어 주체적인 자아, 평등한 세상에 대한 전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난설헌이 도학주의가 공고해지던 조선 중기에 도교에서 탈(脫)유학의 길을 찾았다면, 도학주의의 폐단이 드러날 대로 드러난 조선 후기에 이언진은 이탁오의 급진적 양명학에서 그 길을 찾은 셈이랄까요.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다 가지 못하고 세상을 뜹니다. 더불어 그들이 추구했던 탈유학도 실패합니다. 그리고 완고한 도학주의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조선왕조는 외부의 손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이언진이 노래했듯이 진작 “이따거의 쌍도끼를 빌려 와 확 부숴 버렸으면”2) 그 뒤의 역사가 보여준 치욕과 고통은 없었으련만, 스스로 쇄신할 힘을 잃은 체제는 그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라진 것은 불우했으나 당찬 시인들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억눌렀던 권력인 것 같습니다.     

 

스물일곱 해의 짧은 생애 동안 내내 시대와 불화했던 허난설헌과 이언진. 둘이 한 시대를 나란히 살았으면 서로 지음이 되었을까요? 아마 그들도 신분과 성별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겠지요. 천재에게도 시대는 무거운 것이니까요. 하지만 긴 시대가 흐른 지금, 오직 자신만을 벗하는 아우아(我友我)의 생애는 또 다른 아우아의 노래에서 희망을 봅니다. 지금 쓸쓸한 노래도 영 사라지지는 않으니 지치지 말고 가자고, 책장을 덮으며 스스로의 등을 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