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측백나무 울타리 본문

정수리에 시 한 줄

측백나무 울타리

노바리 2011. 1. 1. 15:53

오고 갈 일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인지

그 길은 자주 호젓하여

울고 난 사람 같았다

슬픔이 가라앉아

지난해보다 우쭉 자란

검푸른 측백나무 울타리 일대는

그 울타리 안과 밖이

서로 딸꾹질을 주고받는 듯하다

이 세상의 몇군데는 제대로 마치지 못한 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슬픔으로 나도 있고 너도 있다

설사 발꿈치로 숨쉬는 사람일지라도

남은 일에 해 저무는 줄 모르리라

늦게까지 남아 있던 새들도

제 둥지로 돌아간 뒤

한동안 귀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도록

새로 울음이 잇대어질 듯하였다

지금 나는 누구의 마음으로 있고

누구의 옷을 내가 입고 있는가

측백나무 울타리 안쪽에 내가 있고

그 밖에 누가 있어

짤막짤막히 몇 마디 말을 주고받다가

아예 입 다물고도

말을 주고받는 것 이상으로

더 바랄 나위 없다

더 바랄 나위 없다

누가 깨달아 이 세상 어디에도

안과 밖 없거나

안과 밖이 하나일지라도

저 초저녁 밤하늘 천진난만한 별들이

불쌍히 여기는 내 몸이야

측백나무 울타리 안에 의지하고

그 밖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만물은 서로 운다 울다가 손님인 양 어둠이 된다

 

-고은 시선집 <오십 년의 사춘기> 중에서

 

측백나무가 늘어선 근처를 걷다보면 가슴에 그늘이 진다.

이 시를 읽으니 또 그렇다.  

'정수리에 시 한 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십억 광년의 고독  (0) 2011.01.02
지구가 너무도 사나운 날에는  (0) 2011.01.02
평화 -고은  (0) 2011.01.01
물 속에서   (0) 2010.12.31
숲의 노래   (0) 2010.1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