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을 만나다 본문

산책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을 만나다

노바리 2018. 10. 14. 12:00

사전의 모든 부분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한 것 같아요. 이젠 어느 팀도 완벽한 사전은 못 내요. 그런 사전을 만들 수 있다고 장담하는 사람은 정말 사전을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해요. 앞선 사전보다 조금씩 나은 사전을 내놓자는 생각으로 하는 거죠.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에서 돌 하나를 더 놓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도원영.      p. 205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


월요일 저녁엔 외출을 삼간다. ‘우리말 겨루기’라는 퀴즈 프로그램을 봐야 해서다. 십 년 넘게 매주 챙겨보는데 볼 때마다 놀란다. 우리말이 너무 어려워서 놀라고, 잘못 알고 쓴 말이 너무 많아서 놀라고, 그 어려운 말들을 척척 맞추는 사람들을 보며 또 놀란다. 먼지만 쌓여가던 두꺼운 <표준국어대사전>을 뒤적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참고하려고 좀 더 읽기 편한 중사전을 샀다. 서점에서 여러 사전을 비교하며 고르고 골랐건만 막상 써보니 없는 단어가 많았다. 사전이 뭐 이러냐고 투덜댔는데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이란 책을 읽고 알았다. 잘못은 만든 사람보다 애초 중사전의 특징을 모르고 산 내게 있다는 것을. 


<최후의 사전 편찬자들>은 웹사전 기획자인 정철이 다섯(부록의 일본 편찬자까지 합하면 여섯) 명의 종이사전 편찬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다섯은 많지 않은 숫자지만 학회, 대학 연구소, 출판사 등 다양한 기관에서 한국어, 외국어, 백과사전을 수십 년씩 만들어온 주역들이라 한국 사전의 역사는 물론 사전에 관한 갖은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첫 인터뷰 상대는 한글학회의 <우리말큰사전>부터 2019년 완성을 목표로 남북이 공동 작업 중인 <겨레말큰사전>에 이르기까지 50년간 사전 편찬에 매달려온 조재수 선생이다. 이력 자체가 한국어사전의 역사인 선생과의 대화는 놀라움의 연속이다. 남북 학자들이 10년 넘게 우리말 사전을 함께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고, “이효석은 「모밀꽃 필 무렵」을 썼지 「메밀꽃 필 무렵」을 쓰진 않았다”는 얘기도 새삼스러웠다.


모밀꽃을 현대의 표준어인 메밀꽃으로 고치는 건 당연하다 여겼는데 조재수는 말을 표준/비표준으로 나누는 방법은 아주 위험하다며, “모든 단어는 독자적이란 생각”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표준어를 부정하는 게 아니다. 지역어, 문학어 등 다양한 어휘를 살리고 표준어를 더 늘려가야 한다는 뜻이다. 순화어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제대혈이란 한자말 대신 탯줄피라고 쓸 때 우리말이 풍요로워지고 언어생활도 편리해지므로 힘들더라도 순화어를 만들어 쓰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며 저자는 “나는 어휘 순화에 부정적이지만 이 말에 토를 달 수는 없었다”고 고백한다. 평생 언어를 다룬 선배의 말이 갖는 무게감, “아무리 잘못된 사전이라도 그 어떤 책보다 가치가 있다”는 그의 사전 사랑을 잘 알기 때문이리라.


국가, 표준, 규범에 비판적인 저자는 대담자들과 종종 의견 차이를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점을 비판할 시간이면 잘못 하나라도 더 고치려는 게 사전 장인들이다. 그들은 날선 공방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신 더 나은 사전에 대한 고민을 함께한다. 책에는 <뿌리깊은 나무>로 출판문화를 혁신한 한창기 이야기도 나오는데, 우리가 누리는 문화적 풍요가 얼마나 많은 헌신에 빚진 것인지 새삼 깨닫게 한다. 덕분에 책을 읽고 나면 지식도 생각도 많아진다. 덤으로 네이버가 제공하는 <표준국어대사전>과 다음의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차이가 뭔지, 어느 쪽이 편한지 같은 깨알 정보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