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여운형에게 길을 묻다 -2017.11월 내일 본문

신문 연재칼럼

여운형에게 길을 묻다 -2017.11월 내일

노바리 2017. 12. 1. 11:26



아버지를 모신 양평공원묘지 가는 길에 몽양 여운형기념관이 있습니다. 도로변의 표지판을 볼 때마다, 해방 직후 몽양의 연설을 직접 들었던 날의 감격을 얘기하시며 이전에도 이후에도 그런 웅변가는 보지 못했다던 아버지의 생전 말씀이 떠올라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차일피일 미루다 올 가을 드디어 기념관을 찾았습니다.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자 벤치에 앉은 몽양이 책을 들고 반깁니다. 그 옆에 어깨를 나란히 하니 착한 학생이 된 것처럼 소곳해집니다. 안타깝게도 몽양의 크나큰 족적을 기리기에는 전시품이 소략합니다. 그래도 몽양의 생전 모습을 담은 짧은 영상과 장례행렬을 따랐던 수많은 만장들은, 그가 얼마나 큰 지도자였으며 인민의 사랑을 받았는지 실감하게 합니다. 영상 속에서 몽양의 급작스런 서거 소식에 사람들이 어린아이처럼 오열합니다. 해방된 나라를 이끌 줄 알았던 지도자가 흉탄에 쓰러진 현실에 몸부림치는 사람들, 그 모습은 다가올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예감한 듯 비참하고 절망적입니다. 왜 안 그랬겠습니까. 이념도 당파도 이익도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좌우와 남북을 오가며 오직 민족의 안위만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지도자를 잃었으니….



스칼라피노 교수와 함께 쓴 <한국 공산주의운동사>로 유명한 정치학자 이정식은 800쪽에 달하는 여운형 평전을 펴내면서, “이승만, 김규식 등을 연구해 전기를 썼지만 나는 여운형을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합니다. 학자가 연구대상에 대해 이렇게 노골적(?)으로 호감을 표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그가 그 이유를 열거하면서, “여운형은 남들이 비판하는 것을 배척하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했다”고 한 걸 보니 이해가 됩니다. 이정식이 지적하듯, 나와 의견이 다르면 “사(邪)이니 사(死)해야 한다는 한국의 송시열적인 정치문화”에서 이런 인물은 매우 드물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정말 이런 사람이 있을까, 몽양이 정말 그랬을까, 의심스러웠습니다. 한데 강덕상, 이기형, 정병준이 쓴 평전들을 읽어보니 정말 그렇더군요. 해방 직후 정당과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자 많은 이들이 난립, 분열이라 비판했지만 몽양은 “민주주의니까 당연하다”고 긍정합니다. 또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좌우 양쪽, 특히 한민당의 반발이 극심했을 때도 “(반대는) 대단히 좋다”고 흔쾌히 수용합니다.(정병준, <몽양여운형평전>) 그러니 그를 “공격”하러 갔던 청년 강원룡이 늙은 민주주의자의 도량에 반해 평생 존경하게 된 것이지요. 지금도 툭하면 국론분열 운운하며 사상과 견해의 차이를 부정하는 이들은 그에게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배워야 할 겁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도 그는 열린 자세를 견지했습니다.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산파 역할을 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레닌을 만나 독립방안을 의논하고, 친일이란 비난을 무릅쓰고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아들여 도쿄 한복판에서 독립 연설을 해 세상을 놀랜 그입니다. 이처럼 외교와 타협에 능하면서도 그는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1943년 비밀리에 건국동맹을 결성하고 내부에 군사조직을 만들 만큼 비합법 무장투쟁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김구의 어머니와 아들들을 몰래 중국으로 내보내 일제로부터 고초를 겪었는가 하면,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출옥했을 때는 은수저를 노잣돈으로 쥐어주기도 했지요. 좌든 우든 외교든 무장이든, 중요한 것은 노선이 아니라 독립국가 건설이었기에 그에겐 김구와 박헌영이 모두 동지요 좌우가 함께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몽양을 가리켜 하지의 정치고문 윌리엄 랭던은 “당대 조선인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자의 전형”이라 했습니다만, 정확히 말하면 ‘조선인’이 아니라 군정과 좌우편향 정치인들이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지요. 결국 그는 그를 감당하지 못한 세력에게 무려 열두 번이나 테러를 당한 끝에 1947년 7월 19일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통일독립국가 건설보다 좌우에 골몰하던 정치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졌지요. 몽양이 간 지 70년. 좌우의 편가르기도 이 땅의 위기도 여전한 오늘, 그의 큰 정치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