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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은 공평하다는 환상

노바리 2017. 11. 29. 12:18

이경숙, <시험국민의 탄생>, 푸른역사


시험국민의 탄생


포항에서 5.4도의 지진이 났다. 땅이 갈라지고 건물이 부서져 80여 명의 부상자와 1천 명이 훌쩍 넘는 이재민이 발생했다. 더 큰 문제는 작년 경주에 이은 이번 지진으로 양산단층의 활성화를 부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단층대에 즐비한 원전을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걱정은 따로 있는 듯, 뉴스에선 일주일 미뤄진 수능시험을 둘러싼 논란과 대비책을 보도하느라 바쁘다. 전 국민의 생존이 달린 지진-원전 대책보다 대학입시가 더 심각한 국가적 관심사가 되는 나라, 시험공화국이다. 그러니 수능 전날 불의의 재난을 겪은 수험생들에게 너희 때문에 우리까지 피해를 본다는 말을 태연히 하는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어쩌다 우리는 생명보다 성적이 중요한 시험국민이 되었을까? 교육학자 이경숙의 <시험국민의 탄생>은 그 비틀린 역사를 좇는 보기 드문 책이다.



이 땅에서 시험이 제도화된 것은 958년 고려가 과거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과거제는 1894년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지만 시험은 여전히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이 유구한 역사는, 과거든 공시든 입시든, 시험이 인재를 뽑는 최선의 방법이란 믿음의 소산이다. 전체 고등학생의 3%에 불과한 서울 지역 특목고생의 서울대 입학률이 40.5%에 달하고, 그 특목고 입학에서 부모의 소득이 지렛대 역할을 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시험이 평등하고 공정한 평가방식이란 전제 아래 국가의 엄격한 관리 감독을 요구한다. 그렇게 국가에 평가의 잣대를 일임하고 국가의 잣대에 자신을 내맡기며 시험국민이 되어간다.



이들 시험국민에게 점수는 곧 능력이므로 성적․학벌에 의한 차별은 당연시된다. 오랜 시간 현장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보다 시험점수가 더 가치를 인정받으며, 임금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노동에 접근하기 위해 거쳤던 치열한 경쟁에 대한 보상”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임금과 복지를 몰아주고, 약자와 실패자를 무시하고 차별한다. 특히 지난여름 기간제교사 정규직화를 둘러싼 갈등에서 나타났듯이, 서열체계를 흔드는 시도는 격렬한 반발을 부른다. 어려서부터 상대평가와 서열로 자신을 파악하고 정체성을 형성해왔기에, 서열을 부정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 여긴다.



<시험국민의 탄생>은 시험이 능력 있는 인재를 선발하는 최선의 제도란 그 믿음에 의문을 제기한다. 필자는 시험이 요구하는 능력은 어떤 능력이며, 그토록 강조하는 변별력이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변별력이냐고 묻는다. 이 물음은 시험의 기준과 문제 출제, 시험하는 대상과 방식 모두가 시험을 주관하는 국가와 기득권층의 이해를 대변하고 강화하는 데 이바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필자가 시험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두가 선망하는 의대나 법대의 경우 고등학교를 졸업할 점수만 되면 추첨으로 입학생을 선발하는 네덜란드처럼, 시험을 사회정의를 위한 실천으로 만들기 위한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질문이며, 이를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묻고 답하는 열린 시험이다. 그러므로 시험을 치기 전에 묻자. 이 시험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