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사회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사람이 되었다 본문

산책

사회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사람이 되었다

노바리 2016. 1. 27. 17:41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어떤 책은 제목 때문에 읽는다. <사람 장소 환대>는 다르다. 뜬금없는 제목이다. 사람, 장소, 환대라는 세 낱말의 맥락은 묘연하고 왜 갑자기 ‘장소’와 ‘환대’를 말하는지 감이 안 잡힌다. 김현경이란 필자의 이름도 낯설다. 어지간한 독자라면 눈길을 주기 힘들다. 그러나 책을 펼쳐 프롤로그를 읽으면 달라진다. 그때부터는 책에서 눈을 떼기 힘들다. 추상적이고 뜬금없게 여겨졌던 책이 읽을수록 지금 이곳의 나와 우리 얘기로 다가온다. 칸트, 데리다, 아렌트, 푸코 같은, 이름만 봐도 골치 아픈 사상가들이 수없이 언급되지만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빈약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저명한 이론을 공연히 끌어댄 것이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고 자신의 해석을 좀 더 분명히 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만큼만 인용했기 때문이다.


책은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언뜻 형이상학적인 물음 같지만 실은 우리가 노상 던지는 질문이다. 사람도 아니라거나 사람노릇을 하라고 하면서, 우리는 운전기사에게 갑질을 한 간장공장 회장을 욕하고, 일 없이 노는 백수를 비웃고, 어린 병사를 학대해 죽인 동료 군인들을 비난하고, 잔인한 연쇄살인범을 죽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런데 그때 우리가 생각하는 ‘사람’이란 대체 무엇이냐고 필자는 묻는다. 정말 사람이 뭘까?


‘생각하는 존재’라는 정의는 유서 깊지만, 사고를 못하는 인간은 사람이 아닌지, 무엇을 얼마큼 생각해야 사람이라 할 수 있는지,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말하듯 무뇌아는 사람이 아니므로 장기를 적출해도 좋은지 같은 의문들에 부딪힌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금언에 담긴 ‘노동하는 존재’라는 정의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못 구한 백수나 일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은 사람이 아닌가?(실제로 이 사회에서 그들은 사람 아니다.) 일 안하고 부동산이나 주식으로 잘 먹고 잘사는 사람들은 어떤가? 사람을 ‘도덕적인 존재’로 정의하는 관행 역시 타인을 비난하는 잣대로만 유용할 뿐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아니라고 낙인찍긴 쉬워도 사람이 무엇인지 정의하긴 어렵다.


김현경은 정의한다. 사람이란 사회에 환대를 받아 장소를 가진 자이다. 사회는 환대를 통해 누가 사람인지 결정하며, 이 사람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회는 다시 결정된다. 즉 사회가 변하면 사람의 정의도 바뀌는데 이런 점에서 역사는 사람 아닌 자들이 사람이 되기 위해 몸부림친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의 외연과 더불어 사람의 외연도 넓어졌다. 과거 사람이 아니었던 노예, 흑인, 여성, 동성애자 등등이 이제는 사람으로 불린다. 기술 발전과 세계화로 일컬어지는 공간적 확장은 이런 흐름을 가속화한다. 


이 유동성은 불안과 동시에 희망을 낳는다. 불안이 이미 사람으로 획정된 이들의 방어심리라면, 희망은 아직 사람이 아닌 자들의 것이다. 김현경은 절대적 환대를 주장함으로써 희망에 대해 말한다. 더 많은 인간에게 사람의 지위를 주고, 그리하여 더 열린 세상에서 더 많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 책임과 권리를 갖는 것이 좁은 울타리 안에서 불안에 떠는 것보다 낫지 않으냐는 것이다.


최근 유럽에서 일어난 난민 성폭력 사건은 절대적 환대라는 비전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람으로 사람노릇하며 살기란 본디 어려운 법이다. 


----------주간경향 2016. 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