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역지사지가 평화다 · 본문

신문 연재칼럼

역지사지가 평화다 ·

노바리 2015. 12. 9. 18:28

 

얼마 전 끝난 드라마 <송곳>을 보다가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는 대사에 무릎을 친 적이 있습니다. 막 노조활동을 시작한 주인공이 프랑스는 노조에 우호적인데 왜 한국에 진출한 프랑스회사는 노조를 탄압하느냐고 묻자 백전노장의 노무사가 한 대답인데, 깊이 공감이 되더군요. 선 자리에 따라 보이는 게 다르고 보는 눈도 달라진다는 건 다들 아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부터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고 입장을 바꿔보라고들 하는 것이지요.

 

한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하려면 공감의 상상력과 더불어 ‘역지’를 하는 데 필요한 지식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고통을 내 것처럼 상상하기도 어렵지만 설령 그런 상상력이 있다 해도 상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없다면 잠시 동정하고 도와줄 순 있어도 지속적인 동반자로 함께하긴 힘듭니다. 다시 말해, ‘내가 너라면’ 하는 ‘역지’의 상상력이 힘을 가지려면 먼저 나와 너의 실체부터 알아야 합니다. 나와 너를 모른 채로 ‘내가 너라면’ 하거나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은 또 다른 오만과 편견이 되기 십상이지요.

 

지난 달 파리에서 끔찍한 테러가 벌어진 뒤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테러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뜨겁습니다. 말만이 아니라 당장 프랑스가 IS의 근거지로 꼽히는 시리아를 공습했고 다른 주요 국가들 역시 동참에 나섰습니다. 딱 한 번 고작 사흘 동안 파리에 가봤을 뿐이지만 그 도시의 자유로움에 깊이 감명을 받은 저 역시 테러에 분노하고 IS 같은 테러 조직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공습으로 IS를 섬멸하거나 테러를 뿌리 뽑을 수 있다고 믿지도 않거니와, 이런 공격이 테러와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눈 없는 폭탄이 테러리스트만 골라 죽였을 리 없으니 결국 지난 몇 년 동안 안팎의 포탄 세례에 시달린 시리아인들이 또다시 참혹한 죽음을 맞았을 텐데, 그 죽음이 파리 시민의 죽음보다 덜 억울한 것은 아니니까요,

 

이제까지 세계는 늘 파리나 뉴욕의 입장에서 생각해왔습니다. 다마스쿠스나 가자나 바그다드에서 시민들이 죽어갈 때 그들과 ‘역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요. 그들의 처지를 상상하려면 그들을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배운 역사에는 그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분노하는지, 왜 싸우는지 모른 채 이슬람 광신도라거나 반인륜적인 테러리스트라고 낙인찍기 바빴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알제리 전투>라는 영화를 본 뒤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프랑스 식민통치에 맞선 알제리 인들의 투쟁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다룬 영화를 보며 처음으로 프랑스가 아닌 알제리 입장에 서게 되었는데, 그때 비로소 누구에겐 테러인 것이 누구에겐 독립과 자유를 위한 저항임을 알겠더군요. 특히나 130년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처럼 우리도 식민지배의 아픔이 있기에 더욱 그들의 처절한 싸움에 공감할 수 있었지요. 그렇다고 카페와 거리에서 테러에 희생되는 프랑스인들을 보는 것이 마음 편했느냐면, 아닙니다. 영화는 그들의 죽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끔찍한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같은 눈으로, 점령군의 소탕작전에 희생당하는 알제리인들의 고통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누가 선이고 악이라고 단정하는 대신, 지옥 같은 세상에서는 누구도 홀로 선하고 홀로 평화일 수 없음을 일깨웁니다.

 

외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족의 선두에서 싸웠던 알제리민족해방전선과, 인민을 자신들의 지배도구로만 여기는 IS나 알카에다 같은 테러조직을 똑같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그 차이는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이슬람’ ‘테러’ 같은 딱지를 붙여 배제하기만 했습니다. 소외는 울분을 낳고 울분은 폭력을 낳습니다. 그렇게 골방에서 분노를 키운 이들의 폭력 앞에 지금 전 세계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에 비하면 광장에서 분노를 외치는 이들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훨씬 더 건강하고 안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광장 밖으로 내몰아 외로운 늑대로 만들기 전에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역지사지의 지혜를 발휘하기를, 세밑에 간절히 기원합니다.

-----------내일신문,12.9

'신문 연재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묻지마’를 묻는다  (0) 2016.05.31
우리에게 내일이 있을까?  (0) 2016.03.25
역사가를 위한 변명  (0) 2015.11.25
금서의 추억 -내일신문  (0) 2015.08.28
그래도 정치가 희망이다 -내일신문  (0) 2015.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