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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 시 한 줄

숲의 노래

노바리 2010. 12. 31. 20:28

친구와 헤어졌다 멀어져가는 그의 잔기침 소리를 등져

나는 허구들을 두고 숲으로 갔다 11월이다

숲은 어떤 모독도 알지 못한다

누가 애타게 기다리지 않아도

마치 오래 기다림이 쌓여 있는 듯

몇 달 뒤면 돋아날

새 눈엽들의 수런대는 꿈마저

다 받아들여

여기저기서 가슴 두근거리고 있다

빈숲의 행운 속에 나는 맥박 치며 그렇게 살아 있다


나는 하고많은 미련이 좋았다

마을로 간 친구 쪽을

한두 번 더 돌아다본 뒤

벌써 어둑어둑한 숲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런 명예도 없이

길은 누구의 길인지 몰랐다

......

명사보다 형용사가 훨씬 많은 나라에서 태어나

나는 하나하나의 이름보다 먼저

하나하나의 슬픔으로 져버린

온갖 나무들의 낙엽에 덮인

말없는 흙에도 닿아 있고 싶었다

발 디딜 때마다

내 발바닥이 작은 꽃들이 핀 듯 찬란하였다


청동기의 때가 흘러갔다

바람의 끝자락이 남아 있고

나중에 올 다른 바람의 예감으로

빈 우듬지들의 수없는 떨림을

이제 나는 볼 수 없다

너무 처절하고자 하였고

너무 황홀하고자 하였다

세상은 가도가도 오류가 판치더라

그동안 찾아다녔던 정답에의 허욕을

여기 와서 살포시 놓아주었다

.......

더 깊숙이 들어갈까 망설였다

밤은 한낮의 거짓들 스스로 물러난 진실의 시간이고 싶으리라

헤어진 친구는 아닐 터이고

여기 먼저 온 사람이

나말고 누구일까

모르겠다

모르겠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저쪽에서 들려오고 있다

어쩌면 내생(來生)의 내 노래인지 몰라 온몸 일어섰다


가지 마라

더 가지 마라라고

내가 나에게 속삭여 경계하였다


그러다가

허구를 사랑하라 복이 있나니라고

내가 나를 유인하고 말았다

더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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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선집 <어느 바람>을 읽다가 발견. 고은 시인의 시에서 감동을 받은 기억이 없는데 이 시는 가슴에 콱 박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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