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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연재칼럼

슬픔을 기억하소서

노바리 2010. 4. 9. 10:27


원고 마감일은 다가오는데 깊은 한숨 속에 파지만 쌓여갑니다. 무언가를 쓰려고 하나 쓸 말이 없습니다. 연일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데 왜 쓸 말이 없냐고요? 하지 않아도 좋을 말들, 하지 말아야 할 말들 때문에 세상이 더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서입니다.

 

서해에서 생떼 같은 목숨들이 종적을 잃은 지 열하루가 지났습니다. 태풍이 몰아친 것도 아닌데 1200톤급 초계함이 침몰하고 마흔여섯이나 되는 군인들이 실종되었다니, 신문에 글을 쓰는 자가 하고픈 말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사고가 일어난 3월 26일 밤부터 지금까지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하겠다

고 마음먹었던 말들을 다 지우기로 했습니다. 부족한 것은 말이 아니라 침묵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 밤부터 말들은 분란을 일으켰습니다. 북한의 공격으로 초계함이 침몰했다는 자막 속보를 내보낸 방송사의 경박한 억측을 시작으로, 각계각층에서는 끊임없이 억설과 예단과 무책임한 말들을 쏟아냈습니다. 특히 사고의 발생과 수습을 둘러싸고 군과 정부는 거듭된 말 바꾸기로 불신을 자초했고, 언론은 물론이요 책임 있는 자리에 선 이들조차 그 말들에 부화뇌동하여 혼란을 부추겼습니다. 그 사이, 말들에 내몰린 무리한 수색으로 어처구니없는 죽음이 줄을 이으면서, 실종자 가족들은 이제 자신들의 슬픔에 죄책감마저 느껴야 하는 참담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처음 사고가 났을 때 온 나라 사람들이 발을 구르며 안타까워 한 것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 아까운 목숨들이 위태로워졌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모두 한마음으로 기도하며 부디 더 큰 희생이 없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어느새 슬픔은 잊혀지고 정략적 판단들만이 세상을 어지럽힙니다. 국회에서 아무리 공방을 해도 지금 사고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상식을 가진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일을 두고 이런저런 설(說)을 입에 올리는 것은 저자거리의 술집에서라면 모를까, 군도 언론도 정치인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원칙과 규정을 무시하고 무리한 수중탐사에 잠수요원들을 투입해서도 안 되고, 충분한 관리 감독 없이 어선들을 동원해 사고 가능성을 높여서도 안 됩니다. 아무리 사태가 시급하고 중대해도 원칙은 지켜져야 합니다. 애초에 원칙과 규정을 세운 까닭이, 혹시 일어날지 모를 사고를 예방해 허망하게 목숨을 잃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니까요.

 

그러나 이 말들 또한 희생된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는 속절없는 허언(虛言)일 뿐입니다. 지극한 슬픔 앞에서 말이 무슨 소용이며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다만 입을 닫아, 상처 입은 마음에 새로운 슬픔을 보태지 않고자 합니다.

 

말문을 닫고 옛 글을 읽습니다. 조선 정조대의 문장가 이덕무가 스물여덟에 죽은 누이를 그리며 쓴 글입니다.

“너는 어머니의 훤칠한 키를 닮았고 나는 어머니의 이마를 닮았으며 네 동생은 말씨를 닮았고 막내는 머리털을 닮아서, 각자 서로를 비교하며 어머니를 잃은 슬픈 마음을 위로했건만 이제는 네 훤칠한 키를 볼 수 없으니 슬픔이 두 배가 되는구나. ……형이 아우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고 아우가 형의 죽음을 가슴 아파하는 이치야 당연한 것이지만, 네가 태어나고 죽는 것을 다 보았으니 나는 원통하고 괴로울 뿐이다. 컴컴한 흙구덩이에 차마 옥 같은 너를 묻으니. 아, 슬프도다!”

 

졸지에 차디찬 바다 속에서 생사를 묻는 처지가 되어버린 이들을 떠올립니다. 왠지 모를 불안감에 마지못해 배에 오른 이도 있고, 다가올 전역 날을 꼽으며 설레었던 이도 있으며, 애인과 다정하게 안부를 묻던 병사도 있습니다. 또 그 바다 속에는, 조금이라도 슬픔을 덜어줄 요량으로 어선을 탔다가 불시에 참경(慘景)을 당한 이국의 젊은이도 있습니다.

 

그들 한 명 한 명의 꿈과 포부와 눈물을 떠올리며 기도합니다. 하늘이여, 부디 이 슬픔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또다시 이런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우리를 깨우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