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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도덕경>을 읽는 까닭은 -내일신문 10.27 본문
책과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종종 어떻게 책을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합니다. 특히 ‘00대 선정 고전 100선’ 같은, 이른바 ‘필독서’ 읽기에 대해 하소연 섞인 질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개 너무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것이지요. 좀 무책임한 말 같지만, 저는 그럼 읽지 말라고 말씀드립니다. 제 경험상,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말은 사실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뜻이고, 나아가 별로 읽고 싶지 않다는 속내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끌리지 않고 읽어야 할 필요를 못 느끼는 책을, 단지 전문가가 추천했다는 이유만으로 읽을 까닭이 어디 있습니까? 읽고 싶은 책을 읽기에도 모자란 게 인생인데 말이지요.
저는 제 안에 질문이 생겼을 때, 지금 그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떠오를 때 읽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가령 이즈음 제가 읽는 <도덕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도덕경>은 오래 전 필독목록에 든 것을 보고 시도했다가 서너 장 읽고 그만둔 뒤로 한 번도 읽을 맘을 내지 않은 책입니다. 섣불리 읽었다간 득보다 독이 되겠구나, 싶어서였지요. 그런데 올 가을 다시 펼쳐들었더니 한 문장 한 문장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읽을 필요를 느낀 때문인데, 발단은 동네에 있는 독립문 역사공원입니다.
사실 작년 여름, 명실상부한 독립공원을 만들겠다며 재조성 사업을 시작했을 때부터 불안하긴 했습니다. 원래 있던 공원은 아름드리나무와 오솔길이 잘 어울려 도심에서는 보기 드문 은은한 정취가 있었는데 무슨 문제가 있어 고친다는 것인지 좀 미심쩍었지요. 그래도 나빠지기야 하랴 했는데, 막상 가림막 뒤에서 나타난 모습은 한숨을 부릅니다.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가을엔 단풍의 정취를 안겨줬던 울창한 수풀이 사라지고, 대리석과 콘크리트 일색의 광장(!)이 나타난 겁니다.
잘 자란 나무를 뽑은 이유는 일제가 조성한 외래종 숲을 한국식 조경으로 바꾸기 위함이라니, 광화문의 백 년 된 은행나무가 사라진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그러나 공원 가장자리에 발 딛기도 미안한 잔디밭을 조성하고 소나무를 심는 것이 한국식 조경인지도 의심스럽거니와, 친일파 청산에는 한없이 너그러운 이들이 왜 나무숲의 식민성에는 그리도 민감한지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독립문 공원만이 아닙니다. 요즘 서울 시내를 다니다 보면 파헤친 도로와 흙먼지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가 없습니다. 여성들의 하이힐 뒤꿈치가 까진다고 보도블록을 바꾸고, 건강과 환경에 좋은 자전거를 타기 위해 도로를 새로 꾸미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뜻도 지나치면 피로를 부릅니다.
노자가 <도덕경>에서 시종 강조하는 것은 무위(無爲)입니다. 이해하기도 어렵고 깨닫기는 더욱 어려운 개념이나, 단순히 생각하면 ‘함이 없다’ ‘일부러 하지 않는다’ 정도의 뜻일 텐데, 저는 ‘위함이 없다’로 새겼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 살고 세상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을 큰 덕목으로 여깁니다. 그런데 노자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남을 위해서든 올바름을 위해서든, 무엇을 위해 뭔가를 하는 짓은 그만두라는 거지요. 왜냐하면 ‘위한다’는 그 생각이 오롯이 나의 시각, 나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내 딴엔 잘한다고 했는데 오히려 상대가 성을 내서 서운했던 경험, 한 번씩은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잘한다’는 건 내 생각일 뿐, 상대에게 정말 잘하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득도를 하기 전에는 오로지 이 ‘모른다’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기를 “정치가 어눌하면 백성들은 순박해지고, 정치가 빈틈이 없으면 백성들은 교활해진다” 했으며, “사람들은 사는 일에 열중하지만 하는 일마다 죽는 길로 가니, 지나치게 삶을 좋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위정자가 국민을 위해 애쓰는 것은 허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일이 정말 국민이 바라는 것인지, 국민을 위한다는 생각이 아집은 아닌지, 그 위하는 마음이 지나쳐 국민을 피로하게 하지는 않는지, 틈틈이 돌아보지 않는 것은 허물입니다. 더구나 국민의 곳간을 빌려 일을 하는 처지라면 남의 재물로 제 이름을 탐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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