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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매미 우는 아침에 -내일신문 8.28 본문
마음이 심란하여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때는 책을 읽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시속(時俗)을 떠난 옛글을 읽으며 흩어졌던 마음을 하나둘 그러모읍니다.
“지극한 슬픔이 닥치면 온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기만 해서 그저 한 뼘 땅이라도 있으면 뚫고 들어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하지만 다행히 나는 두 눈이 있어 글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한 권의 책을 들고 슬픈 마음을 위로하며 조용히 책을 읽는다. 만일 내가 온갖 색깔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해도 서책을 읽지 못하는 까막눈이라면 장차 무슨 수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최고의 책벌레 이덕무가 젊은 날에 쓴 글입니다. 그는 과거도 볼 수 없는 서얼 출신으로 긴 세월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그를 지독한 슬픔에 잠기게 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쓰일 희망도 없이 책을 읽어야 했던 불우한 서생에게 슬픔은 또한 당연한 것이었겠지요. 앎을 행하고 싶은 열망으로부터 스스로 눈을 감고 귀를 닫아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찌 슬프지 않았겠습니까.
책에서 위로를 찾던 옛사람을 떠올리며 책장을 넘기는데 문득 찌르는 듯한 울음소리가 귀청을 때립니다. 매미입니다. 여느 해보다 뒤가 긴 여름, 매미 울음소리도 이 계절을 닮아 끝이 없이 이어집니다. 저렇게 큰 소리로 울어대는데 그 동안 못 듣고 있었던 것이 이상하고, 미안합니다.
곤충의 삶을 사람의 눈으로 읽는 것이 부질없기는 하지만, 매미의 일생은 자못 처연한 데가 있습니다. 시끄러운 울음소리와 달리 그의 평생은 침묵 속에서 흘러갑니다. 3년씩 7년씩, 때로는 13년, 17년을 캄캄한 땅속에서 나무 수액만 먹으며 조용히 살다가 간신히 해 아래 나와 날개를 폅니다. 하지만 그에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열흘이나 보름쯤 목청껏 울다 가는 게 고작이지요. 그래서인지, 그 울음소리는 아무 구애가 없습니다. 온몸을 바쳐 땅과 하늘을 울리는 혼신의 울음을 웁니다. 그리고 울음이 다하면 미련 없이 마른 몸을 버립니다. 물기 하나 없이 바삭한 그 몸뚱이는 여한 없는 생의 증거인 듯,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합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입 안에 매미 모양의 옥(玉)을 넣었다고 합니다. 하필 왜 매미였을까요. 허물을 벗고 다시 태어나는 매미처럼 새 삶을 받아 다시 태어나라는 소망일까요, 아니면 맑은 수액만 먹고 살다가 한바탕 잘 울고 떠나는 매미처럼 가뭇없이 떠나라는 기원일까요? 아마도 두 마음이 더해져 생겨난 의식이겠지요.
매미 울음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던 날, 길고 지루한 여름의 끝에서 한 사람이 이 땅을 떠났습니다. 이 여름의 시작에서 떠난 한 사람도 아직 보내지 못했는데 또 다시 영결입니다. 떠난 두 사람은 생전에 잘 울었습니다. 억울해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가여워서 울고, 고마워서 우는 모습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내보였지요. 그러나 나는 두 사람의 울음에 귀를 막곤 했습니다. 남자의 울음을 반기지 않는 세상을 핑계 삼아, 너무 시끄럽다고, 그만 좀 울라고 투덜거린 적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헌데 그 울음이 다하여 적막한 이 아침,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 왜 이리 귓전에 쟁쟁한지요. 지치지도 않고 이 땅을 위해 울었던 사람이여, 늙은 몸을 가눌 수 없는 슬픔에 아이처럼 펑펑 울었던 사람이여, 당신은 여한 없이 울었습니다. 남은 울음은 살아남은 우리의 몫이니 우리의 울음이 하늘의 천장을 칠 때 부디 웃어주세요. 천 개의 바람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부디 평안하세요. 아주 오래된 노래와 함께 이제 당신을 보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에 없습니다.
나는 잠들지 않았습니다.
나는 천 개의 바람입니다.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눈이며
무르익은 곡식을 비추는 햇빛이며
촉촉이 내리는 가을비입니다.
고요한 아침 당신이 눈뜰 때
원을 그리며 포르르 날아오르는 조용한 새이고
밤하늘에 빛나는 부드러운 별입니다.
내 무덤가에서 울지 마세요.
나는 거기 없습니다.
나는 죽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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