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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리에 시 한 줄

패배는 나의 힘

노바리 2008. 7. 8. 17:17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대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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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관(1968-) 시집으로 <패배는 나의 힘>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가 있다.

 

상징이 깊고 은유가 놀라운 시는 아니다. 쉽고 어떤 점에서 좀 뻔한 시다. 하지만 때론 이 익숙함이 가슴을 칠 때가 있다. 싸움을, 싸움의 목적을, 싸움의 대상을 잊은 날은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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