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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해 죽다

노바리 2015. 11. 5. 14:48

마르크 블로크, <역사를 위한 변명>, 한길사  / <이상한 패배>, 까치 



개인이든 국가든 자세한 내력을 알면 실망하기 쉽다. 내세운 말이나 기치는 아름답지만 정작 행동은 그에 미치지 못하거나 배반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한데 현대 역사학에 새 장을 연 「아날」의 창시자 마르크 블로크는 다르다. 그는 중세사에 관한 탁월한 저작을 남긴 성실한 학자였고, “더 넓고 더 인간적인 역사학”에 대한 신념을 역사로 만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진실한 인간이었다.



제2차 대전이 터지자 소르본 대학의 교수이며 여섯 아이의 아버지였던 블로크는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쉰셋의 나이에 자원입대했다. 프랑스가 점령당한 뒤에도 그는 레지스탕스로 계속 싸웠고 결국 게슈타포에 체포돼 뼈가 부러지는 혹독한 고문 끝에 총살당했다. 마지막 날, 그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던 레지스탕스 대원들 중에는 어린 소년도 있었다. 겁에 질린 소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총에 맞으면 아프겠지요?" 블로크는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아니, 안 아플 거야. 금방 끝날 거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숨졌다.

당시 그를 독일군에 넘긴 것은 비시정부의 의용대였다.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친일파에게 희생되었듯이 블로크도 친독파의 밀고로 목숨을 잃은 것인데, 아쉽게도(?) 양쪽의 닮은 점은 딱 거기까지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4만 여명의 대독 협력자가 단죄되는 등 과거사 청산이 이루어졌지만 한국의 친일파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으므로. 아무튼 역사와 인간에 대한 회의가 깊어질 때 이런 사람을 떠올리면 정신이 번쩍 든다. 그래서 블로크의 유작 <역사를 위한 변명>과 <이상한 패배>를 꺼내 들었다. 시절 탓인지 70여 년 전에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생생하다.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한 직후 패전의 원인을 분석한 <이상한 패배>에서, 그는 무능한 군사령부, 제 이익만 챙긴 부르주아지와 노동자, 국민에게 최소한의 정보도 주지 않은 정부와 언론, 시험성적만 중시하는 교육 등 프랑스의 모든 제도와 계층에게 패배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전쟁은 “거꾸로 이해된 역사의 오류에 빠져 있는 늙은이들의 전쟁”이며, “집단적 연대성”에 붙들려 “도덕적 독립성”을 이루지 못한 사회 분위기가 패전의 주 요인이라고 말하면서. 하지만 갈등과 분열 때문에 졌다는 지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유로운 나라에서 반대되는 사회철학이 자유롭게 싸우는 것은 건강한 일”이고 “조국의 불행은 이 충돌의 정당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고 비판한다.



블로크는 나라의 앞날이 어찌될지 모르는 긴박한 상황에서 생애 마지막 역사서인 <역사를 위한 변명>을 썼지만 그 내용은 조국의 역사를 찬양하거나 하나의 올바른 역사를 주장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도리어 그런 역사는 없으며 그것은 역사학이 할 일이 아니라고 역설한다. ‘역사가 대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질문에 답하면서, 역사의 유용성을 열거하는 대신 역사적 분석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역사가는 어떤 일을 하는지 설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역사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은 물론이요, 툭하면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역사로 현실을 합리화하는 활동가들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흔히들 역사가 심판한다고 하지만 블로크는 이 또한 부정한다. 그는 역사란 무엇-국가든 정의든-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변화의 과학”이며 이 과학을 통해 인간과 현실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그가 역사는 “인간의 차이와 다양성을 이해하는 노력”이라며 죽는 날까지 노력한 것은, 다양성을 억누른 역사(학)로 인해 조국 프랑스가 외세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블로크는 싫어했겠지만 나는 지행합일의 이 역사가에게서 교훈을 구하고 싶다. 백여 년 전 횡행하던 제국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지금 이 순간, 다시 무릎 꿇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역사학이 필요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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