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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광해를 생각하며 -내일신문 본문
한동안 사극에서 정조가 인기를 끌더니 요즘은 광해군이 새롭게 떠오르고 있습니다. <광해, 왕이 된 남자>, <왕의 얼굴>에 이어 최근 들어서는 광해군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 드라마 <화정>과 <징비록>이 화제입니다. 예전의 궁중 사극에서 광해군은 비록 아홉 살 어린 계모이지만 어쨌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어린 이복동생을 죽인 극악한 패륜아로 묘사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임진전쟁을 배경으로 한 <징비록>에서 광해군은 오직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선조와 달리 위기에 처한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참된 군주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그려지며, 한창 화제몰이중인 <화정>에서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개혁을 모색하는 야심찬 군주로 등장합니다. 모두 전에는 상상할 수 없던 모습인데, 이것만 봐도 역사적 해석이 시대와 가치관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광해군을 폭군으로 묘사한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른 것입니다. 광해군은 재위 15년 만에 인조를 내세운 반정세력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고 <실록>은 그들에 의해 씌어졌으니 객관적인 평가를 기대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그런데도 과거의 사극들이 보여주는 것처럼 우리는 유교윤리를 내세운 이 승리자의 기록을 오랫동안 당연시하며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지요. 이는 왕조가 망하고 시대가 바뀐 뒤에도 한국 사회가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으며 역사학 역시 마찬가지임을 반영합니다.
사실 역사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광해군이 한 인간으로서 도덕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임금으로서 그 시대에 어떤 역할을 했는가일 겁니다. 최근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도 이 점에 주목한 때문이고요. 이때 평가의 핵심은 사대주의입니다. 인조반정이 내세운 명분은 첫째가 패륜이고 둘째가 후금과 우호를 맺은 것인데, 이복동생을 죽이고 계모를 핍박한 광해의 패륜에 그토록 치를 떤 이들이 뒷날 아들과 며느리, 세 손자를 죽음으로 몬 인조의 패륜에는 눈 감은 걸 보면 첫째는 그리 중요한 명분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즉, 사대부들이 왕을 내쫓은 진짜 이유는 후금을 인정하는 ‘반인륜적’ 외교에 있었지요. 이게 왜 ‘반인륜’이냐 하면 명(明)은 부모 나라인데 그 부모를 배신하고 오랑캐와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입니다.
역사학자 계승범의 연구에 따르면, 명나라를 부모로 섬기기 시작한 중종 때 이후로 조선의 지배층은 대명 사대를 ‘하늘의 도리[天理]’로 여겼답니다. 혹자는 사대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선택된 하나의 외교형태라고 하지만, 실제론 조선이 유교국가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중기 이후 사대주의는 외교정책이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절대 이념이었지요. 허약한 왕권을 유지하기 위해 명 황제의 권위를 빌린 중종과 선조는 물론, 성리학적 질서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그 왕들을 다그친 선비들도 사대를 신봉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광해군은 이런 흐름에 반기를 든 왕이었습니다. 전쟁으로 왕조의 정통성이 근본부터 흔들리던 시기에 광해군은 철저히 현실적인 관점에서 나라의 정신적, 물질적 토대를 다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고려 때부터 하늘에 제사지내던 환구단 천제(天祭)의 전통을 되살려 국가의 독자적인 권위를 세우려 했고, 후금[청]과의 전쟁에 파병하라는 명의 요청을 거부했지요. 그러나 신하들은 “전하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황제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다”며 이에 격렬히 반대했고 결국 반역을 일으켜 그를 내쫓았습니다. 그들에게 충성이란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중국의 황제에 대한 것이었으니까요.
외부의 힘에 기대어 내부의 실리와 요구를 무시한 지배층의 사대주의로 인해 한반도가 얼마나 오랫동안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 우리는 압니다. 그런 부끄럽고 참담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우리 안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이 새삼 광해군에게 눈을 돌리는 이유도 그래서이니, 부디 이번엔 그 실리 정신이 거짓 명분을 이기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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