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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것만큼 근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책과삶> 5월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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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것만큼 근사한 일이 또 있을까요? -<책과삶> 5월호

노바리 2016. 5. 10. 12:23

지난 봄 볕 좋은 날, 북촌에서 독서신문 <책과삶>의 박혜강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뜻밖의 질문으로 기분좋은 놀람을 선사한 박 기자. 그녀가 정성껏 쓴 기사를 감사한 마음으로 읽는다.  


파란 빛깔의 바탕. 하얀 세로글씨. 눈길을 사로잡는 표지를 지나칠 수 없어 몇 장 더 넘기니 내지는 더욱 눈길을 끈다. 왼쪽에는 시에서 뽑은 문장 하나가, 오른쪽에는 그 문장과 엮인 개인적인 감상이 담겨 있다. 그렇게 108개의 문장과 이야기는 옹기종기 모였다. 느슨하게 이어진 시와 에세이는 따로 또 같이 호흡 중이었다.

이 책, 《시의 문장들》은 힘이 드는 순간마다 시를 읽어왔다는 김이경 작가의 손에서 탄생했다. 시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사람, 늘 읽던 시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써달라는 후배 편집자의 제안으로 시작된 작업이었다. 그녀 역시 자신이 왜 그렇게 시를 읽어왔는지, 또 시가 주는 놀라운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기도 했다.


“시작은 한 줄이에요. 한 줄이 좋으면 점점 시 한 편을 읽게 되죠. 시간이 없어서 책을 못 본다는 말은 ‘시’에는 적용되지 않아요. 20분이면 되거든요. 시 한 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시간은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요.”


짧은 언어로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시’라고 말한 김 작가는 시인이 말을 배열하는 데에는 다 의미가 있다고 했다. 시를 읽으면서 ‘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했을까?’ 생각하다보면 사고력이 깊어지고 상상력도 풍부해지며 언어 감각은 민감해진단다. 다른 사람의 속을 헤아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일도, 적절한 상황에 맞는 문구를 끌어오는 일에도 도움을 주니 일거다득 아닌가. 그러니 속는 셈치고 한 번 읽어보란다. 하지만 너무 쉽게 이해되거나 늘 같은 시만 읽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어떤 식으로든 말을 응축하고, 깊이 사유해야 알 수 있는 의미들이 담긴 것이 진짜 ‘시’이기에.


문득 요즘 유행하는 SNS시에 대한 김 작가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그들이 지닌 기발함과 재미는 인정하지만 그것이 시의 전부는 아니라고 본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마따나 기발함과 재미는 광고 카피나 문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주체적으로 여러 사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시, 세계를 다르게 보는 눈을 줌으로써 내가 속한 세계에 대한 의심까지 이끌어낼 수 있는 시가 ‘좋은 시’란다. SNS시를 통해 시의 매력을 맛봤다면, 조금 더 긴 호흡의 시를 읽어보기를, 읽으며 질문도 던져보기를 권했다.


김 작가에게 시의 맛을 알려준 시는 김수영과 기형도의 시다. 전자는 큰 그늘이자 나무 같은 시라서, 후자는 연애할 때 늘 읽은 시라서 남다르게 다가왔다. 김수영의 시는 「풀」만 봤을 때 왜 그리 유명한지 몰랐단다. 오히려 뻔한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시 전집을 오랜 시간 읽다 보니 그 이전에 쓴 시들이 「풀」로 가는 연결점을 지녔음을 깨달았다. 시인이 단순히 시를 쓰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고민하며 지냈는지, 삶의 철학을 세우기 위해 애썼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시가 다르게 보였다. 하나씩 수수께끼를 푸는 희열감도 그 안에 있었다. 관심이 가는 시는 비평집을 찾아서 읽고, 시인에 대해서도 알아가며 이해가 깊어지는 과정을 겪었다.


“처음엔 반해서 읽고, 그 다음엔 거리감을 두고 읽어요. 사실 ‘정확’하게 읽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에요. 모든 책을 그렇게 보진 못하지만, 지금의 내게 어떤 답을 건네는 책을 만날 때, 그땐 그 답이 맞는지 의심해보는 게 꼭 필요해요. 그 과정에서 내 문제가 뭔지 알게 되거든요. 특히 내 인생에서 이 책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질문하며 읽는 것, 그게 중요하죠.”


어떤 독서를 하는지에 대한 김 작가의 대답에는 뼈가 있었다. 바람직한 독서는 부모들이 먼저 읽고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서 시작한다는 말도 의미 있게 들렸다. 책을 읽으라고 백 번 말하기보다 어른 스스로가 무언가 열심히 읽으려 하고, 세상에 대해 나름대로 해석하고 대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그런 태도를 보고 자란 아이들이야말로 읽는 것의 가치를 알아 주체적인 독자로 성장한다는 것.

작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죽음’에 관한 책을 더욱 집중해서 본다는 김 작가는 그에 관한 생각들을 정리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도 죽음에 포커스를 두고 읽으니 새롭게 보이는 부분들이 꽤 된단다. 죽음은 누구든 피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인데 반해 진지하게 성찰하려는 움직임은 사회적으로 부족하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그녀는 늘 내면의 질문을 직시하고, 그 답을 찾기 위한 독서 여정을 떠나는 사람처럼 보였다. 혹, 이런 독서 여정에 이끌렸다면, 조언대로 속는 셈치고 시 한 편 먼저 읽어보는 건 어떨까. 시가 데려다 줄 질문 앞에 서는 일이 독서 여정의 근사한 시작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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