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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보다 반일이 문제라고?

노바리 2012. 6. 28. 17:30

엊그제 저녁밥을 먹는데 머리가 웅웅했다. 밥상을 물리고도 굉음은 계속됐다. 집옆에 바로 군부대도 있고 청와대가 멀지 않은 동네라 헬기 소리 따위가 가끔 시끄럽지만 그날처럼 오래 시끄러운 적은 없었다. 산책을 나갔더니 끊임없이 청와대 쪽에서 보통 헬기보다 큰 헬기들이 들고나기를 반복한다. 하도 왔다갔다 해서 몇 차례나 오갔는지 셀 수도 없었다. 청와대에 무슨 변고가 생겼나? 무슨 심각한 일이 일어났나?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결국 뭔일인지 모른 채 굉음이 잦아들면서 잊었다.

그런데 오늘 뉴스를 보다가 갑자기 떠올랐다. 그날 몰래 국무회의를 열고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기로 의결했다니 혹시 국무위원들이 몰래 헬기 타고 모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그 생각이 드는 순간, 다시 머리가 아프다. 그래서 내가 그날 그토록 골이 아프고 어쩐지 불안하면서 부아가 났구나, 이제야 이해가 된다.

국회도 국민 여론도 다 무시한 채 정부가 그처럼 중요한 협정 체결을 몰래 의결했다는 건 민주주의 체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대 여론 때문에 정부의 정책 수행이 힘들고 피곤해도 민주주의는 그 피곤함을 감수하는 게 원칙인 체제다. 그게 싫어서 삼대에 걸쳐 독재하는 북한을 비난하고,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종북좌파라고 비난하기 일쑤인 정부와 새누리당이 앞장서 민주주의를 훼손하다니.  

밀실 의결 사실이 알려진 뒤 야당과 시민단체들이 반대하자 새누리당 대변인은 안보를 위해 필요한 군사협력을 '괜한 반일감정'으로 반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걸 보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뒷골이 당겼다. '괜한 반일'이라니, 이 사람들은 역사 공부도 안 하나? 일본의 침략으로 이 땅에 피바람이 불고, 숱한 목숨이 억울하게 죽고 희생당한 것이 백 년도 안 됐는데 '반일'이 근거없는 '괜한' 짓이라고?

그래 지금 조선일보, 동아일보 같은 유력지 신문사 사주들은 일제 치하에서도 몸에 상처 하나 안 입고 돈과 명예를 유지, 증가시켰으니 '괜한 반일'이 맞다. 삼성, 두산, 현대 같은 재벌가도 일제 치하에서 치부를 시작했으니 혹 반일 감정이 있다면 '괜한 반일'이다.

하지만 일제에 의해 청춘을 뺏기고 평생을 치욕 속에 산 정신대 어르신들, 노임 한 푼 못 받고 괜한 노동을 죽도록 한 징용 피해자들, 일본군에 징집되어 일본인으로 죽어간 수많은 조선 사내들, 독립을 외쳤다가 끔찍한 고문을 겪고 지하감옥에서 신음하다 죽어간 유관순을 비롯한 숱한 민족투사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만큼 섬세한 영혼으로 생체실험을 당하다가 죽은 윤동주와 그의 친구들, 그리고 일제의 지배로 왜곡된 이 나라 사회와 역사가 결국 맞고 말았던 한국전쟁까지, 이 모든 걸 조금이라도 떠올린다면 반일은 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고 마땅한 것이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와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다자이 오사무와 오에 겐자부로를 좋아하지만, 제국주의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미국과 결탁하여 여전히 동북아에서 패권을 유지하려는 일본군국을 반대하며 강한 반일 감정을 느낀다.

일제 식민지시기가 이 땅에 뿌린 죄와 멍에는 너무도 크고 아직도 도처에 남아 있다. 우리를 너무도 괴롭히는 분단마저도 식민지에서 잉태된 것. 내겐 한줌의 종북세력보다 권력을 가진 친일세력이 더 무섭다. 종북은 넌센스지만 친일은 권력이니 비웃을 수조차 없다.

밀실에서 일본과의 군사협정을 체결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 말한다. 권력을 휘두르기 전에 책부터 읽어라. 당신이 사는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부터 배워라. 그러고도 일본과 군사협정을 하겠다면 친일의 이름으로 친일파를 자임하고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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