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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이것은 옛날이야기-2 본문
*
마침내 사업 얘기가 나온 것은 요릿집에서 자리를 옮겨 간 신식 바에서다. 신식 술집이 낯선 경천과 달리 병수는 능숙하다. 세 사람이 자리를 잡자 양장에 단발머리를 한 여학생이 술을 들고 온다. 술집 여급의 청초함에 경천은 잠깐 놀란다.
“동경 유학생입니다.”
“에? 근디 왜 여서…”
“애비가 만세운동 하다가 집안이 다 망했지요.”
“쯧쯧.”
“애비 잘못 만난 게 죄지 얘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여학생은 고개를 떨구고 병수는 침을 튀긴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제야말로 아버님이 나서실 때입니다.”
“나가?”
“예. 이 조선 땅에 아버님같이 돈 있고 배포 있는 분이 몇이나 있습니까? 아버님이 이 나라를 위해서, 저런 불쌍한 애들을 위해서 큰 사업을 해야지요. 공장도 짓고 학교도 만들고 문화사업도 하고 말씀입니다.”
“그랑께 자네들이 하잔 것이 문화사업이여?”
“아뇨, 아닙니다.”
변 사장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옆자리 병수를 노려본다. 병수는 여유만만이다.
“아버님도! 변 사장이 뭘 안다고 문화사업을 합니까? 문화사업이란 게 돈이 있어야 하고 돈보다 뜻이 있어야 하고, 뭣보담 뚜렷한 정신이 있어야 하는 건데. 안 그래요, 변 사장?”
“어, 그렇지, 뭐.”
변 사장은 떨떠름한 얼굴로 술잔을 비운다.
“그래서 제가 고무공장이나 잘해 보라고 했습니다.”
“고무신 맨드는 공장?”
“역시 우리 아버님이 잘 아시네. 예, 지금은 고무신을 만들지만 사실은, (목소리를 잔뜩 낮춰) 제가 일본군에 선이 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론 군인들 신는 군화를 만들어서 독점적으로다가 팔려고 합니다. 일본은 옛날부터 사무라이 나라라 군인이 최고니까 장사도 군인 상대를 해야 합죠. 변 사장은 조그만 고무신 공장이면 된다고 하는 걸 제가 안 된다고, 기왕 하는 사업 제대로 하자고 했습니다. 아버님, 제가 잘은 모르지만 사업이 푼돈 먹는 게 아니잖습니까?”
병수를 보는 경천의 눈이 촉촉해진다. 한가 놈이 그래도 아들 하나는 건졌구나, 투전판에서 막을 내린 비참한 인생이지만 아주 헛산 건 아니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그래, 얼마나 필요하냐?”
변 사장의 눈이 커진다. 지독하기로 소문난 김경천이 이리 쉽게 돈을 내주다니 상상도 못한 일이다. 입이 헤벌어진 변 사장과 달리 병수는 고개를 숙인 채 한동안 말이 없다. 불쑥 얼굴을 쳐든 병수의 눈 주위가 벌겋다.
“보잘것없는 절 믿어주시고… 아버님, 제가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흐흑, 정말 혼신을 다해서 제가 제대로 아들노릇 하겠습니다.”
경천은 흐뭇하다. 늘그막에 얻은 재간둥이가 신통해서 경천은 흘러넘치도록 술을 부어준다.
*
싸움 구경은 그걸로 끝이다. 빗맞은 돌에 귀가 반쯤 떨어져 나간 장교 나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며 병원으로 실려 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이다” 미친 듯 고함을 치며 순사에게 개처럼 끌려간 뒤, 눈물콧물 범벅이 된 기남에게 자초지종을 일러준 건 옆집 작은 곰보다.
“장교 나리가 순산가 수윈가 암튼 뭐가 됐다고 쫙 채려입고 왔더라. 그러더니 다짜고짜 니 아부지를 막 부르대, 나오라고.”
작은 곰보는 말하는 틈틈이 기남을 흘끔거리며 기남이 얻어온 밥과 찬을 입으로 가져간다. 기남은 혼이 쑥 빠져서, 작은 곰보의 시커먼 손이 바가지를 휘저어도 그저 멍할 뿐이다.
“니 아부지가 뭐냐고 으르니까 딸 팔아먹은 놈이 지랄한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니 아부지가 죽인다고, 와 진짜 무섭게 싸우더라. 나는 니네 아부지가 폐병쟁이라 골골하니까, 쌈이야 뭐, 니가 장교 나리를 메다꽂았다고 해도 설마 했거든? 근데 오늘 보니까 니 말이 맞더라, 붕붕 나르더라고.”
“딸 팔아먹었다고? 그것 땜에 왜 아부지가 그래? 맨날 하는 얘기잖어.”
작은 곰보는 텅 빈 바가지를 싹싹 훑더니 손가락까지 쪽쪽 빤다. 거적 틈으로 차가운 바람이 휘익 불어온다. 등골이 오싹하다. 듣는 귀도 없건만 작은 곰보가 잔뜩 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니 동생, 선이가 어디로 팔려갔는지 아냐? 그 가시나가 어떤 늙은이한테 갔는지 아느냔 말야?”
기남의 입이 한식 앞둔 묏등마냥 바싹 마른다. 엄청난 일이, 무서운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차라리 작은 곰보의 입을 막아버리고 싶다. 하지만 손끝 하나 꼼짝할 수가 없다.
“휴, 느이 아부지가 김경천이한테 선이를 팔아먹었대, 김경천이!”
몸은 가만있는데 세상이 빙빙 돈다. 누가 귀를 꼭 막았다 뗀 것처럼 귓속이 울리고 속이 울렁거린다. 선이가 김경천이네 윗방아기로 갔다고, 아버지가 그 원수 놈한테 선이를, 어린 선이를 팔아먹었다고! 기남은 작은 곰보의 주둥이를 향해 두 주먹을 뻗는다.
기남이 초점 잃은 눈으로 두 팔을 허우적대는 걸 보고서야 작은 곰보는 정신이 번쩍 든다. 귀싸대기를 올려붙이자 풀썩 앞으로 쓰러졌던 기남이 이내 정신을 차린다. 하마터면 넋이 나갈 뻔한 것이다. 작은 곰보는 그제야 자기가 기남에게 얼마나 끔찍한 말을 했는지 깨닫는다. 작은 곰보의 아버지도 한때 기남의 아버지와 같은 무리에 있었다. 비록 작은 곰보의 아버지는 공주 싸움에서 패하고 그길로 영 무리를 떠났지만 마음만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기남의 아버지가 툭하면 술을 먹고 행패를 부려도 작은 곰보네 아버지는 욕하는 사람들을 나무라고 기남이네를 챙겼다. 오늘만 해도 작은 곰보의 아버지가 있었더라면 저리 싸움이 커지도록 구경만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어엉, 엉엉.”
정신이 든 기남이 목 놓아 운다. 꺽꺽, 가슴을 치며 우는 걸 보니 작은 곰보도 눈물이 난다. 엉엉, 둘은 부둥켜안고 운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그저 울고 또 운다.
*
모두가 행복한 술자리다. 병수가 여학생에게 노래를 시킨다. 귀에 착 달라붙기야 기생의 육자배기를 어찌 당하랴마는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뽑아내는 하이칼라 노래에 경천은 새삼 가슴이 설렌다. 노래를 끝낸 여학생이 옆에 앉아 술을 따른다. 도톰한 귓불이 발갛다. 경천은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 모습을 흘끔거리며 병수는 말을 잇는다.
“아버님, 오산학교라고 아세요? 유기장수 이승훈이가 세운 학굔데.”
“유기장수 이승훈이?”
“예, 원래는 상놈인데 유기 팔아 번 돈으로 학교를 세워서 아주 유명해졌어요. 요샌 민족교육가니 뭐니, 유세가 보통이 아닙니다. 사실 조선을 위해 큰일을 하신 건 아버님인데 누가 알아줍니까? 무식한 놈들이 뭣도 모르고 욕이나 하고. 그래서 말씀이지만 아버님, 이제부턴 공장사업도 하고 교육사업도 하는 겁니다. 총독부에서도 그런 사업을 하면 함부로 못합니다. 불쌍한 애들 취직도 시키고 공부도 시켜서 아버님 이름을 대대손손 남기면 얼마나 좋습니까.”
경천은 이제껏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경천학원을 세워 가난한 애들을 거둬라, 그러면 그 애들이 김경천을 하늘같이 우러르고 따를 것이다. 조선 팔도에 김경천 이름 석 자가 쩌렁할 것이다. 병수의 말을 듣는 동안 경천은 머리가 맑아지고 눈앞이 환해진다. 늘어진 사지에 피가 돌고 가슴이 뛴다. 거만의 부를 쌓고도 풀리지 않던 응어리가 비로소 뻥 뚫리는 기분이다. 돈버러지 소리를 들으며 왜놈 눈치에 고향사람 눈치, 배운 아들놈에 잘난 며느리 눈치까지 보면서 살아온 세월도 오늘로 끝이다. 경천은 병수의 손을 부여잡는다. 돈독 오른 사람백정 김경천이 아니라 민족사업가 김경천이 눈에 선하다.
*
“저기 저 차다!”
“틀림없어?”
“응, 아까 저기로 들어가는 거 봤어. 여기 지키고 있으면 나올 거다.”
“알았어. 넌 그만 가.”
“뭐?”
어둠이 곰보자국을 덮어서, 달빛에 희미하게 드러난 작은 곰보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앳돼 보인다. 얼굴이 얽은 데다 아는 소리를 잘해서 다 큰 줄 알았는데 지금 기남 앞의 사내애는 잔뜩 겁에 질려 있다.
“진짜 괜찮어? 뭐 할 건데, 김경천이 죽일 거야?”
“쉿! 죽이긴 누가 죽여. 그냥 얼굴만 볼 거야, 얼굴만 봐두고… 긍께 넌 가, 얼릉.”
그 말에 작은 곰보는 안심하는 눈치다. 기남이 어서 가라고 손짓을 하자 작은 곰보가 기다렸다는 듯 돌아선다. 몇 걸음 가다가 작은 곰보가 흘긋 뒤를 돌아본다. 서로의 표정을 읽기에는 이미 먼 거리다. 작은 곰보가 돌아서 뛰기 시작한다. 저만치 달려가는 작은 곰보를 보자 기남의 가슴께가 찌르르 한다. 가란다고 가냐. 기남은 머리를 흔든다. 오른손에 쥔 과도를 꽉 움켜잡는다. 작은 곰보 몰래 집에서 나올 때 챙겨온 무기다. 그래, 전쟁이다. 원수를 갚는 일이다. 내가 원수를 갚는다, 아버지의 원수, 선이의 원수, 이 나라의 원수!
희미하던 달빛마저 사라진 밤이다. 몸이 으슬으슬 떨린다. 볼이 선뜩선뜩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이다. 배가 고프다. 모처럼 쌀밥을 얻었건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끌려간 아버지. 달려온 순사한테 속절없이 매타작을 당하던 아버지. 눈물이 흐른다. 어룽어룽 눈물 고인 눈으로 집을 떠나던 선이, 가슴을 치던 어머니. 기남은 눈물을 훔친다. 눈을 부릅뜬다. 이를 악물고 오로지 앞만 본다. 골목 안이 수런거린다. 왁자한 웃음소리와 함께 사람들이 나온다. 땅딸막한 남자와 비쩍 마른 남자 뒤로 풍채 좋은 사내가 보인다. 사내가 불쑥 앞으로 나오더니 비틀거리며 자동차 쪽으로 간다. 저 놈이로구나! 기남의 눈이 화등잔만 해진다. 말로만 듣던 김경천이, 아버지의 원수요 민족의 원수, 불쌍한 선이를 데려간 짐승 같은 놈이 커다란 몸통을 흔들며 웃는다. 기남, 품에서 칼을 뽑는다.
달린다.
세 사람은 저마다 흐뭇해서 술집을 나선다. 병수가 경천을 부축하고 변 사장이 앞장서 자동차로 다가간다. 그때다. 변 사장이 차 뒷문을 여는 순간 시커먼 물체가 달려든다. “윽!” 비명과 함께 변 사장이 고꾸라진다. 운전수가 놀라 튀어나오고 병수가 “저놈 잡아라!” 소리친다. 머뭇거리던 괴한이 몸을 돌려 뛰기 시작한다. 운전수가, 병수가, 뒤를 쫓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큰 길에 닿기도 전에 일이 벌어진다. 전차다. 전차에 받힌 괴한이 선로에 너부러진다. 모가지가 쿨럭쿨럭 하더니 그만이다. 아직 어린아이다. 부릅뜬 눈동자 위로 진눈깨비가 내려앉는다. 전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에구, 어쩌나, 한마디씩 한다. 캭, 병수가 침을 뱉는다. 재수 없는 애새끼 때문에 다된 밥에 코 빠지는 건 아닌지, 술이 단번에 깬다.
“뭐하냐? 빨리 와!”
경천이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다. 변 사장의 상처는 깊지 않다. 하얗게 질린 변 사장을 태우고 자동차는 골목을 빠져나간다. 선로 위에는 아직도 소년의 시체가 넝마처럼 구겨져 있다.
“어떤 놈이여?”
“비렁뱅이 같던데, 어린애더라고요. 변 사장이 돈푼깨나 있어 보였는지.”
“거참, 세상이 말세구먼. 어린놈이 칼부림이나 하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러니 아버님이 나서서 저런 종자들을 이끌어주셔야지요.”
경천은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 그것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것들에게 희망을 찾아주어야 한다. 자신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 차창 뒤로 너덜너덜한 시체를 거적에 둘둘 마는 모습이 보인다. 그래, 저렇게 가련한 인생을 구제해주자. 이 김경천이가 다시 한번 나라를 구해보자. 경천은 가슴이 벅차오른다. 자동차는 진눈깨비 내리는 밤거리를 쏜살같이 달려간다.
*
작품후기:
몇 해 전 이 교수가 총장이 되었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나만이 아니라 그에게 배운, 그를 겪은 이들이 모두 그랬다. 세상이 공평하게 올바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맥이 풀리고 살 희망이 사라졌다. 저런 이가 바라던 대로 성공하는 세상이구나, 한탄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내 가장 완강한 이데올로기는 대학시절 나를 매혹했던 아나키즘도, 어렵게 동참한 맑시즘도 뭣도 아닌, 다만 권선징악, 그 오랜 믿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오랜, 태내에서부터 내게 새겨진 그 믿음이 무너졌음을.
이 총장이 임기를 채우는 동안 벗과 나는 남은 날을 헤며 함께 기막혀하고 씁쓸히 웃곤 했다. 그런 어느 날, 벗이 네가 소설을 쓴다면 이걸 써라, 꼭 써라 하고 말했다. 숙제를 받아들고 또 긴 날을 보낸 뒤 이 소설을 썼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 올 가을, 소설은 문예지 <좋은소설>을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한번 무너진 믿음을 다시 세우진 못했지만 쓰러진 자리에서도 삶은 이렇게 계속된다.
나를 절망케했던 이 씨는 지금 역사교과서 개악의 주역이 되어 활발히 활동중이다. 그에게도 삶은 그렇게 계속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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