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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량특집 독서 제2탄! - 『미궁에 빠진 조선』

노바리 2010. 9. 4. 10:16


더위가 기승을 부립니다. 내키지 않던 에어컨 바람마저 반가워지는 복더위,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지난번 『처녀귀신』에 이은 납량특집 제2탄! 유승희가 쓴 『미궁에 빠진 조선』입니다. ‘누가 진짜 살인자인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조선시대에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했던 14건의 살인사건을 파헤친 범죄 역사서입니다.


젊은 역사학자 유승희가 『일성록(日省錄)』을 비롯해 『포도청등록(捕盜廳謄錄)』『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흠흠신서(欽欽新書)』『심리록(審理錄)』 등 수많은 자료를 섭렵하며 범죄, 그 중에서도 살인범죄에 주목한 이유는, 그것이 당대 사회의 특성과 모순을 한눈에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범죄는 당사자의 의도와 심리는 물론, 그 뒤에 숨은 사회적 갈등과 의식까지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사 분석의 중요한 고리가 됩니다. 또한 범죄를 다루는 수사방법, 검시기술, 형벌제도 등은 당시의 과학수준과 법의식까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지요. 이 책에 나오는 윤언서 살인사건은 그 중에서도 특히 끔찍한 사례입니다.


1788년(정조 12) 정월 초사흘, 강진현 동헌 밖에 한 사내가 붉은 창자를 둘러메고 와서는 살인을 했다고 고했습니다. 사내의 이름은 윤항, 어깨에 멘 창자는 그가 죽인 윤언서의 작은창자였습니다. 엽기적인 사건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도 깜짝 놀랄 끔찍한 사건이지요. 하지만 윤항은, 아버지 윤덕규가 문중의 서얼인 윤태서, 윤언서 형제에게 맞아죽었기에 형 윤침과 함께 복수를 했다며 태연했습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부모나 형제, 남편의 원한을 갚기 위해 살인을 하면 정상참작을 해서 죄를 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윤항의 경우는 살인만 한 것이 아니라 간을 꺼내 씹어 먹고 창자까지 몸에 두르는 등, 행위가 워낙 잔인해서 처리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습니다.


아무튼 사건 조사에 나선 검험관들은 우선 윤항 형제의 행위가 복수에 해당하는지 보기 위해 윤덕규의 죽음부터 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이전의 검안을 토대로 초검과 복검을 한 결과, 관찰사는 윤덕규가 윤언서에게 맞아죽은 것이 아니며, 따라서 윤항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이로써 사건은 일단락이 되는 듯했지요.  


그러나 그해 4월, 윤항의 여동생 윤임현이 한양까지 천릿길을 달려와 임금에게 격쟁1)을 하면서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윤임현의 호소를 들은 정조는 형조로 사건을 넘겨 진상을 밝히도록 했고, 형조에서는 윤덕규의 죽음은 윤태서 형제의 폭행치사이므로 윤항 형제는 복수를 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정조는 일을 잘못 처리한 관찰사를 처벌하고, 윤언서의 형 윤태서를 폭행치사죄로 옥에 가두는 한편, 윤항 형제는 석방토록 했습니다.


그토록 잔혹한 짓을 저질렀는데도 석방을 했으니, 조선 사회가 효(孝)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만하지요. 하지만 정약용이 법에 호소하지 않고 잔인한 보복을 한 윤항의 죄는 징계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은 걸 보면, 정조의 관대한 처분에 모두가 동의한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고 보면 유달리 관대한 정조의 판결에는, 뒤주에서 숨을 거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과 복수심이 깔려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정조와 정약용 얘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이 책을 읽고 새로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혁군주’나 ‘최고의 실학자’로만 알고 있던 정조와 정약용이 사실은 ‘최고의 과학수사관’이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책에 실린 14건 중 3건은 정약용이 검사관으로 직접 활약한 사건인데, 특히 그 중 둘은 다른 이가 조사하던 것을 정조가 다시 정약용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만큼 정조가 정약용의 수사능력을 믿었다는 이야기겠지요.


정조는 평소 “옥안(獄案)을 살피는 것을 경서 읽는 것에 비유”했다고 합니다. 수사는 물론이요, 수사 기록도 꼼꼼히 하고 정밀히 읽어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정조의 총신이었던 정약용은 임금의 뜻을 충실히 따랐습니다. “국가의 문자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옥안”이라며 검험과 옥안을 중요시했고, 형옥을 다룬 저서의 제목을 ‘신중하고 신중하라(欽欽)’는 『흠흠신서』로 하여 경계의 뜻을 분명히 했습니다. 모두 잘못된 검험이나 부주의한 심리로 혹 억울한 백성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지요. 


그 덕분에 사지(死地)에서 살아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한양 사는 함봉련입니다. 1794년 한성부에 나졸 서필흥이 환자(還子)2)를 받으러 갔다가 동네 사람들에게 맞아죽었다는 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1793년 12월 17일 서필흥은 김말손의 환곡을 받으러 갔다가 여의치 않자 대신 그의 팔촌 김상필의 송아지를 강제로 끌고 갔고, 이에 화가 난 김상필이 김대순, 함봉련 등과 쫓아가서 그를 집단 구타하는 바람에 결국 12일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서필흥은 죽기 직전 아내에게 김상필이 자신을 죽였으니 복수하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초검에서는 주위 증언과 검시 결과를 토대로 주범을 함봉련으로 적시했습니다. 한성부 재검 역시 결론은 같았습니다. 마지막으로 형조의 세 당상관이 해당 낭관과 두 검시관과 함께 죄인을 신문하는 회추(會推)를 실시했고, 여기서도 함봉련이 주범으로 인정돼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하지만 함봉련의 사형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자백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증거가 있어도 범인이 자백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었지요. 함봉련은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3년을 더 버텼습니다. 마침내 서필흥이 죽은 지 3년 만에 함봉련이 자백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정조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백의 정황이 애매하다는 이유였지요. 사실 정조는 함봉련 외에 여러 김씨들이 함께 행동했는데 다른 사람은 범행에서 빠진 것도 이상했고, 검안의 기록도 미심쩍었습니다.


조사가 다시 시작되자 함봉련은 자백을 번복했고, 그 뒤로 사건은 3년을 더 끌었습니다. 1799년 정조는 곡산부사로 있던 정약용을 형조참의로 불러들여 전국의 형사 사건을 심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함봉련 사건 관련 자료를 주며 재심리를 하라고 명했습니다. 형조의 관리들은 6년이나 지난 사건이고 판결도 났으니 그만두자고 말렸으나 정약용은 초검, 재검 기록들을 꼼꼼히 살폈습니다.  


정약용은 검안을 통해 사망의 주 원인은 가슴을 구타당한 것인데, 가슴을 짓찧은 것은 김상필의 무릎이며, 함봉련은 손으로 등을 떠밀었다는 것을 밝혀냅니다. 그리고 현장 증언을 한 이들이 모두 김상필의 일가이며 함봉련은 그 집안의 머슴이라는 것도 확인합니다. 정약용의 보고를 받은 정조는 즉시 함봉련을 풀어주고 옷갓을 내려주었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도 모두 태워 없앴습니다. 그리고 김상필을 붙잡아 정배형에 처했습니다.


이 짧은 글에서 이처럼 자세하게 경위를 적은 이유는, 봉건 신분사회였던 조선에서도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이처럼 오랜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을 보여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책에 나오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엽기적인 범죄는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이 원래 그리 잔인하다고 생각하면 슬프고, 꼭 지금 시대만 무서운 건 아니라고 생각하면 다행이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무 연줄 없는 머슴 하나를 위해서도 6년 이상 최선을 다했던 정조 임금을 떠올리면 역시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하나의 목숨도 이렇게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다시 올까? 슬픔과 함께 두려움이 밀려드는 한여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