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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숨은 책방
버스 안에서 본문
며칠 전 버스에서의 일입니다. 옆자리에 남자 대학생 둘이 앉아 이야기를 하는데, 상소리를 예사로 하는 요즘 젊은이들과 달리 깔끔한 차림새만큼이나 말씨도 단정해서 흐뭇했습니다. 대화를 들어보니 둘은 고교 동창생으로, 한 명은 서울대학생, 다른 한 명은 캐나다 유학생이었습니다. 한참 성적 걱정을 하던 둘은, 그 또래 남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군대를 화제에 올렸습니다.
“군대도 가야 되잖아.”
“난 안 가. 지난번에 한국 국적 포기했어.”
“와, 좋겠다!”
“근데 국적 포기했어도 입국할 때 뭐가 복잡하더라. 우리나라는 왜 그러냐? 이중국적 하면 될 걸.”
“노무현 때 막았잖아.”
“아니, 왜?”
“노무현이 고졸이잖아. 열등감이지, 뭐.”
거기서 둘은 버스를 내렸습니다. 제 심박수를 고려할 때 그쯤에서 내린 게 여간 다행이 아니었지요. 하지만 그들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도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백령도에서 군복무 중인 조카였습니다.
아직 첫 휴가도 나오지 못한 조카가 입대할 때, 아이 아버지는 항암치료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형부를 대신해 제가 언니와 함께 신병 교육대로 배웅을 갔었지요. 봄비가 내리던 그날, 대열 속으로 사라지는 조카를 보면서 이 땅의 평화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제 자신의 무기력에 가슴을 쳤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기꺼이 짊어진 조카가 기특해 가슴 뿌듯했습니다.
얼마 전 TV에서 유명 연예인이 아들을 미국에서 낳았다고 고백해 물의를 빚었습니다. 또 외국의 유명대학을 나와 가요계의 브레인으로 통하던 한 가수는 학력 위조 시비가 병역기피를 위한 국적 문제로 비화돼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병역기피를 노린 원정출산이요 국적 취득이라며 비난의 소리가 높습니다.
하지만 제가 버스에서 본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하고 싶은 일을 한 것뿐이고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 그렇게 못하는 이른바 ‘루저’들의 열등감이 아니냐고 할 것 같습니다. 사실 그들만이 아닙니다. 엊그제도 동네 찻집에서 미국 시민권자라는 유학생을 다른 친구들이 내놓고 부러워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군대에 가기 싫은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처럼 노골적으로 한국 국적을 기피하고 외국 국적을 선망하는 데는 말문이 막힙니다. 저는 ‘국가’를 강조하는 국가주의 마케팅이 마땅찮아 월드컵도 안 보는 사람입니다만, 한국 사회에서 국적과 군대가 갖는 의미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외국 국적 덕분에 이 사회에 살면서 병역을 피했다면 그것은 부끄럽고 미안한 일입니다. 더구나 처음부터 병역 기피를 노리고 국적을 취득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부와 지위를 이용해 편법으로 사회적 책임을 회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유명환 외교부장관은 “한나라당 찍으면 전쟁”이라고 생각하는 젊은층을 비판하며 “이런 정신상태로는 나라를 지탱하지 못한다,”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김정일 밑으로 가서 살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비판과 견제가 민주주의의 기본임을 모르는 그의 무지도 걱정스럽지만, 지금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야당을 지지하는 ‘정신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제 나라 국적을 포기하는 ‘정신상태’임을 모르는 무지는 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이 사회에 사는 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믿는 고지식한 부모와 아이들이 자부심이 아니라 열패감을 느낀다면, 이 나라가 과연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이 이 땅에서 ‘국가’가 갖는 남다른 의미를 고민하기는커녕, 국적 포기를 선망하고 학력을 이유로 사람을 폄하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그가 이 사회의 지배층이 됐을 때 과연 나라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할지, 혹 최고 엘리트 출신으로 성희롱 파문을 일으킨 강용석 국회의원처럼 타인을 모욕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섭니다.
버스에서 본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식엔 책임이 따르며, 책임을 모르는 성공은 죄악입니다. 부디 당신의 공부가 모두의 기쁨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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