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명절 후 당신을 위한 ‘책 처방’ -시사인 2018.추석특집호

노바리 2018. 10. 6. 13:54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강창래,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스티그 라르손,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예전엔 명절이, 특히 추석이 좋았다. 달콤한 송편을 먹을 수 있어서. 이제는 송편도 추석도 성가실 뿐이다. 대체휴일로 명절 연휴를 늘려주는 정부의 호의도 마뜩잖다. 집이 일터인 주부는 식구가 놀면 일이 늘고 덩달아 화도 는다. 차례상 차리고 치우고 밥상 차리고 치우고 다과상 차리고 치우다보면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울컥한다. 이럴 땐 한바탕 울거나 웃으면 맘이 풀린다. 그래서 준비한 두 권의 독서처방.


첫 번째 책은 출판기획자며 작가인 강창래가 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말기암을 앓는 아내를 위해 3년간 밥상을 차리며 쓴 요리 일기인데,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야기만 가득할 것 같지만 아니다. 칭찬에 인색했던 편집자(아내)의 호평처럼 글이 절제되어 있고 우아하다.” 그런 글로 꾹꾹 눌러쓴 담백한 요리책이다. 슬픔은 요리에 들어간 양파처럼 행간에 스며 있고 드러나는 건 갖은 음식의 조리법이다. 라면이나 끓이다가 오십 넘어 요리를 시작했다는데 된장찌개, 잡채는 기본이요 해삼탕에 돔베국수까지 못하는 게 없다. 아픈 아내에게 한 술이라도 더 먹이려는 간절함의 소산이다.


간절함이 없어선지, 20년 넘게 밥을 했지만 이런 요리는 엄두도 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고 해보고 싶다. 문장만큼 담백한 레시피 덕분이고, 누군가를 위해 밥하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새삼 깨달은 까닭이다. 하여 책을 덮고 정성껏 음식을 장만했다. 그러나 책은 책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그 당연한 사실을 잊었다니. 다시 울화가 치민다. 새로운 처방이 필요하다. 좀 통쾌한 책, 답답한 현실을 잊고 전혀 다른 세상을 꿈꾸게 하는 책이 없을까. 있다.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다.


스웨덴의 독립 언론인 스티그 라르손이 쓴 이 추리소설은 전 세계에서 5천만 부가 넘게 팔린 초특급 베스트셀러 밀레니엄시리즈의 1부작이다. 설명이 필요 없는 이런 책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한국의 독자 특히 여성 독자들이 그 진가를 잘 모르는 듯해서다. 나도 작년에야 읽었다. 우울과 무기력증에 허우적댈 때 시간을 죽이려고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엔 그저 그랬다. 낯선 인명, 지명은 몰입을 방해했고 매 장() 첫머리에 적힌 여성폭력에 관한 짧은 글은 뜬금없었다. 이게 소설 내용과 무슨 상관이지?


그렇게 책에 빠져들었고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밥하는 시간은 물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정의롭고 속 깊은 남자 주인공도 멋졌지만 무엇보다 반항적인 천재 해커 리스베트를 비롯해 탁월한 리더십의 에리카, 씩씩하고 정의로운 모니카와 수산나 등 어디서도 보지 못한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에 반해버렸다. 그녀들이 힘을 합쳐, 권력을 남용하고 여성을 유린하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자들을 응징하는 걸 보자 평생 쌓인 체증이 내려가고 기운이 났다.


아마 당신도 그럴 것이다. 징징대며 원망하는 대신 당당히 맞서 제 삶을 누리는 여성들을 보면 이제야말로 더도 덜도 없는 한가위 같은 매일을 살고 싶어질 것이다. 부디 그러기를! (혹시 시리즈를 다 읽고 싶다면 3부작까지만! 4부는 원저자와는 무관하다. 자세한 내막은 스티그의 옆지기 에바가 쓴 <밀레니엄 스티그와 나>를 보면 알 수 있다.)


***<시사인>에서 명절증후군용 독서처방을 의뢰해서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