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옆 책방

버닝을 보고

노바리 2018. 7. 10. 17:30

이창동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영화 감독. '버닝'이 칸에서 수상을 못했을 때, 영화를 보기 전인데도 심사위원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 영화에서 여성을 다룬 방식이 문제였다는 보도를 보고 이창동이 그럴 리 없는데, 그랬다. 요즘 피곤해서 극장을 안 갔지만 이건 꼭 봐야지 하고 하루키의 원작 '헛간을 태우다'까지 읽고 영화를 보러 갔다.

결론적으로 칸의 선택은 옳았고 이 감독에 대한 믿음은 한풀 꺽였다. 여주인공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그가 아픔을 말하는 게 외려 낯설고 이상하다. 배우의 연기도 이런 뜨악함에 한몫한다. 유아인이 연기하는 남자주인공도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의 무기력을 타개하는 대상으로 여주인공을 이용한다는 점만 분명할 뿐. 두 남자가 똑같이 한 여성을 권태와 무기력의 숨통쯤으로 여겼다는 것, 그 대상을 잃은 남자가 다른 남자에게 화풀이를 한다는 것, 그게 전부다. 그러니 영화는 대상이 된 여성의 절망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실망스러울 밖에.

하루키의 단편은 잘 짜인 소품인데 거기에 너무 무거운 포장을 씌운 느낌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오히려 리뷰들에서 최고 평점을 준 이유가 궁금해진다. 아마 여성주의 비평가는 없었지 않았을까. 여성을 모르고 알려고도 안 하는, 그러면서 여성을 이야기하는, 이창동이 그런 무례를 범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