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칼럼

억울함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노바리 2017. 3. 22. 10:24

매일 도서관을 찾는 것은 그곳의 고즈넉함이 좋아서입니다. 한데 얼마 전부터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큰소리로 따지고 항의하는 이들이 늘어난 때문입니다. 제삼자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이면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불공평하고 억울하다고. 연체를 한 것도, 컴퓨터가 다운된 것도, 심지어 옆 사람 몸에서 냄새가 나는 것까지 다 도서관 탓을 하며 성내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김수영 시인의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라는 시구가 떠오릅니다. 그토록 사소한 일에 왜 저렇게 화를 내는지, 자신이 잘못하고서 뭐가 억울하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기야 요사이 억울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약과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뒤 열린 첫 재판에서 최순실이 “제가 안고 갈 짐은 안고 가겠다. 하지만 국정농단으로 몰고 가는 건 억울하다”고 해서 실소했는데, 청와대를 나온 박 전 대통령마저 똑같이 “모든 결과는 제가 안고 가겠다. (그러나) 시간이 걸려도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하는 데는 놀랐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나라가 이렇게 혼란스러워졌으면 죄의 유무를 떠나 국민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건만 억울함부터 토로하다니요. 이러니 뇌물을 건넨 재벌총수도 억울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든 대통령 비서실장도 억울하고, 그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억울하고, 그 식솔들도 억울하고… 온 나라에 억울한 사람 천지일 밖에요.


도대체 우리 사회엔 왜 이렇게 억울한 사람이 많을까요? 이유가 궁금해서 판사 유영근이 쓴 <우리는 왜 억울한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자에 따르면 “억울함은 잘못된 일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전제로 한다”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사소한 일로 분개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이나 중대한 범죄의 피의자로 수사를 받게 된 대통령이나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믿는다는 점에선 똑같습니다. 자신은 잘못이 없는데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았다는 피해의식이 억울함으로 이어진 것이지요.


이상한 일은 교통단속에 걸린 운전자가 “다른 차도 잘못했는데 왜 나만 잡느냐, 억울하다”고 하는 것처럼,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고도 억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는 겁니다. 객관적인 사실보다 주관적인 판단을 앞세우고 잘못에 대한 책임보다 처벌의 공정함을 문제 삼아 억울해하는 것인데, 이는 진짜 억울한 사람을 만드는 권력의 남용만큼이나 사회를 흔드는 위험요소입니다. 책을 보니 서구에서는 억울함을 인간의 주된 감정으로 다루지 않는답니다. ‘감정의 윤리학자’로 불리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한 48가지 감정에도 억울함은 들어 있지 않을 정도지요. 아마도 억울한 게 없어서가 아니라 불공정한 상황에서 억울하다는 감정에 매달리는 대신, 부당함을 초래한 인식과 구조를 바꾸는 데 힘쓰기 때문일 겁니다.


반면 한국인들은 유난히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이는 불공정을 바로잡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미흡한데다가, 오랜 독재와 짧은 민주주의의 역사로 인해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신뢰하는 분위기가 부족한 탓입니다. 유영근 판사는 국론통일을 내세워 하나의 답만 강요하는 사회가 억울한 사람을 양산한다면서, 민주 사회에서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음은 재판을 비롯한 모든 판단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래야만 소수자의 억울함을 최소로 줄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정치인들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가운데 지지자들의 공방도 뜨겁습니다. 민주사회에서만 누릴 수 있는 즐거운 공방이라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됩니다. 구체적인 정책과 무관하게 진보 보수 딱지를 붙여 편 가르기를 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만 옳고 경쟁자는 무조건 비난하는 정치 팬덤 때문입니다. 언젠가부터 노사모, 박사모처럼 특정 정치인을 사랑하는 모임이 유행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라도 시민의 정치 참여가 특정인을 사랑하는 형태를 띠는 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억울함이 아니라 모두의 억울함을 푸는 정치, 억울함을 토로하기 전에 책임을 생각하는 시민의식이 꼭 필요한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