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광인이 다스리는 귀신의 나라, 그 실상을 기록하다

노바리 2016. 11. 15. 11:00

황현 지음, 김종익 역,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




1910년 8월 조선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자 매천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과거에 일등으로 급제했으나 시골 출신이란 이유로 2등으로 깎인 전력뿐, 유서에 밝혔듯 벼슬 한 자리 한 적 없으니 왕조가 망했다고 목숨을 내놓을 의리 따위는 없었다. 그럼에도 자결을 택하는 이유를 그는 “나라가 5백년간 사대부를 길렀는데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이라 했다. 죽기 전에 쓴 절명시에서는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노릇 하기 어렵구나” 하고 탄식했으니, 나라를 그 지경으로 만든 권력자들은 아무도 망국의 책임을 지지 않으리란 절망감, 양반 지식인으로서의 자괴감과 책임감이 그를 죽음으로 이끈 셈이었다.



평생의 신조인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순국을 결단하긴 했으나 그는 불의를 보면 못 참는 행동파는 아니었다. 항일의병을 일으킨 고광순이 격문을 청하자 거절했다가 나중에 전사한 그의 시신을 수습하며 “나처럼 글만 아는 사람을 무엇에 쓰겠느냐”고 자탄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오래 생각하고 고심하는 서생이었다. 하여 그 자신 ‘귀국광인(鬼國狂人)’이라 비판한, ‘미친 자들이 다스리는 귀신같은 나라’에 살면서 그가 택한 것은 무기가 아니라 붓이었다. 동학농민항쟁이 일어나고 이를 빌미로 중국과 일본이 이 땅에서 패권을 겨루는 혼란 속에서 그는 <오하기문>를 쓰기 시작했다. 온 나라가 전쟁터가 되어버린 마당에 지리산 자락에서 역사책이나 쓰는 게 마뜩찮았으나 책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인터넷은 고사하고 신문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 외진 구례에서 서울의 왕실과 조정 안 사정부터 전국 팔도 정세, 민심의 동향까지 상세히 파악한 정보력은 놀랍기만 하다. 고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왕조시대엔 상상도 못한 언론자유와 최첨단 기기로 무장하고도 왜곡, 늦장, 편파보도를 일삼는 요즘 기자들이 이 저널리즘의 비조를 보면 뭐라 할지. 집요하리만큼 꼼꼼한 기록 또한 그가 자신의 일에 얼마나 치열했는지 보여준다. 책에는 임금의 조서 등 주요 정부문서를 비롯해 외국의 외교문서, 지방관들의 보고서, 공문, 상소문, 민간에서 유행한 노래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다. 지배층의 역사 왜곡에 대비해 최대한 사실을 전하려 한 것인데, 그만큼 사실(事實)이 사실(史實)로써 갖는 힘을 믿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는 그 기록을 <오동나무 아래서 역사를 기록하다>로 옮긴 번역자 김종익(민간인 불법사찰의 피해자로 더 잘 알려진 고전 인문학자다)의 믿음이기도 하리라.



그들의 지독한 성실함 덕에 광인이 다스리는 귀신같은 나라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감사한 일인데 책 읽기는 쉽지 않다. 두꺼운 분량 탓이 아니다. 나라가 그 모양인데도 굿에 돈을 쓰고 그 돈을 마련하느라 관직을 파는 왕과 왕비, 부패와 무능을 일삼다가 동학을 막겠다며 외세를 끌어들이는 정부의 낯익은 행태가 새삼 부아를 돋운다. 민란을 일으키는 까닭을 잘 알면서도 평등을 실천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동학군에 대해 “모조리 도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대부 황현의 한계도 보기 괴롭다.



역사에 부끄럽지 않게 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사심을 앞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충심만으로도 부족하다. 역사는 가차없이 그 이상을 요구한다. 답은 민심 안에 있음이 분명하지만 민심의 뒤꽁무니만 좇는 오늘의 지도자에게선 답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