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삶이 집을 짓는다

노바리 2015. 7. 29. 12:38

로완 무어, <우리가 집을 짓는 10가지 이유>

 

건축 책은 잘 읽지 않았다. 유명 건축물에서 감동보다 불편을 더 많이 느낀 터라 건축에 관한 담론이 그들만의 리그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다. 그런 내가 건축비평가 로완 무어의 책 <우리가 집을 짓는 10가지 이유>를 읽은 것은 뒤표지에 실린 글 때문이었다. 어느 부부가 집을 증축하려고 건축가를 만났다.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건축가가 말했다. 증축보다 그냥 이혼하시죠. 킬킬, 공감의 웃음이 터지면서 읽고 싶어졌다.

 

시작은 두바이. 화려한 마천루에서 나온 하수 때문에 멋진 요트가 엉망이 되고 결국 하수를 운반하는 트럭운전수들이 무거운 벌금을 물었다는 이야기에 다시 웃음이, 허나 이번엔 쓴 웃음이 나왔다. “두바이를 보면 건축에서 욕망이란 외형에 나타나는 광기인 것 같다”는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미치지 않고야 사람이 먹고 싸는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모를 수가 있나. 그러나 냄새나는 삶은 외면한 채 오로지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것이 어디 두바이뿐이던가. 밥상 앞에서 사진부터 찍는 사람들이나 집이며 사무실, 화장실까지 유리로 도배를 하는 최신 건축이나 보여주기에 사로잡혀 있긴 매한가지다.

 

그런 세태를 비웃긴 쉽다. 하지만 보여주기로부터 자유롭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무리동물인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존재와 직결된다. 남의 눈 밖에 나지 않으면서도 눈에 띄는 특별함을 가질 때 존재는 더 안전하고 풍요로워진다. 거주공간인 집이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고, 수단이 다시 삶의 목적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필자의 말처럼 집은 도구이자 상징이니 살기 편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 실용만 내세우면 정서는 억눌리다 못해 왜곡되고, 욕망만 앞세우면 삶은 배제된 채 “희망의 탐욕”만 남는다. 최악은 감정이 실용을 가장할 때다. 자신의 탐욕을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강변할 때 건축도 삶도 실패한다. 

 

건축물의 외관이 대개 과장되어 있는 것은 형식에서 마법이 나오기를, 즉 눈부신 외관이 눈부신 미래를 만들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법은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건축물이 삶과 함께할 때” 일어난다. 예를 들어 가난한 건축을 표방한 칠레의 엘레멘탈 사(社)는 집의 절반만 짓고 나머지는 거주자들이 각자의 필요에 따라 완성하는 마법 같은 건축을 선보였고, 서울역 고가 공원화에 영감을 제공한 뉴욕의 하이라인은 획일적인 공간 대신 사람들 사이의 마찰을 수용하여 역동적인 공간을 만드는 마법을 펼쳤다.

 

그리고 책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한 “삶의 건축가” 리나 보 바르디가 있다. 그녀의 건축은 “건축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거주하는 것이고, 보는 것”이라는 소박하지만 자명한 진실을 실현한다. 그녀가 상파울루의 사회문화센터 쎄시 폼페이아를 지으면서 그린 설계도는, 건물을 짓고 사용할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건축가가 얼마나 애썼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어린애의 그림처럼 단순한 도면은 위대한 작품을 짓겠다는 야심보다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려는 열망으로 가득하다. 전 세계의 유명 건축들을 섭렵한 뒤, 무어는 그 열망이 이루어진 마법의 장소에서 말한다. 건축은 ‘완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과 시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그 말처럼, 우리의 집이 완성되려면 기다려야 한다. 시간이 우리의 꿈을 허락할 때까지.

<주간경향> 2015.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