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불안을 잊게 해준 고마운 책
앨런 와츠, 이석명 옮김, <불안이 주는 지혜>, 마디
꿈자리가 뒤숭숭해 깨어 보니 새벽 세 시.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하지만 잡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일어나 물 한 잔을 마시고 서성댄다. 가슴이 답답하다. 앞날을 생각하면 겁이 나고 곧 시작될 하루를 떠올리면 부질없다. 맥을 놓고 앉아 있는데 탁자 위의 책이 눈에 든다. <불안이 주는 지혜>. 낮에 후배에게서 선물로 받은 책이다. 1950,60년대 미국 비트운동을 이끈 앨런 와츠가 썼다는데, 아마도 요즘 유행하는 그저 그런 심리학책이겠거니 하며 건성 책장을 넘겼다.
그런데 머리말이 신선하다. 현대인이 겪는 불안은 안정을 추구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는 진단도 그렇거니와, 물을 종이상자에 담아 보내서 받는 사람이 포장을 푸는 순간 물벼락을 맞게 하고 싶었던 어린 시절의 꿈을 얘기하며, 인생에 대한 온갖 철학과 해법이 실은 물 같은 삶을 종이상자에 넣으려는 안간힘이 아니냐고 한 대목도 새삼스럽다. 그 재미에 계속 읽는다. 수런거리던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랜만에 맛보는 평화다.
이런저런 책들이 다 도움이 안 되었는데 오래 전에 나온 215쪽짜리 작은 책이 마음을 가라앉혀준다. 왜 그럴까. 불가지론자인 나는 신이나 영원을 믿지 않지만 그래도 삶에는 어떤 의미나 목적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한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언젠가부터 삶에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회의를 지울 수가 없었다. 기를 쓰고 살아도 죽으면 끝인데 굳이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하면서 전전긍긍할 필요가 무엇이냐는 허무감, 그렇게 헛되이 죽고 말 거라는 절망감이 불안을 낳고 불면을 불렀다.
그런데 앨런 와츠는 의미가 있다고 위로하는 대신, 신도 목적도 없다고 딱 잘라 말한다. 그런 식으로 뭔가가 있다고 하는 건 자신의 삶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기 위한 ‘믿음’이며 흐르는 물 같은 삶을 움켜잡으려는 헛된 기도일 뿐이니 그만둬야 한다고. 회의가 가득하던 차에 이처럼 분명한 얘기를 들으니 통쾌하면서도 불안하다. 아무런 믿음 없이 어떻게 살지? 와츠 왈(曰), “삶에 아무런 목적이 없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정말? 어떻게?
와츠는 ‘어떻게’를 묻기 전에 문제 자체를 이해하란다. 문제를 제대로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니, 가령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라는 질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나’가 누구이며 ‘산다’는 게 뭔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지속되는 ‘나’가 있다고 믿고 그 ‘나’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지만 와츠는 그런 ‘나’란 생각의 산물일 뿐, 실제 존재하는 것은 매 순간을 경험하는 물 같은 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
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산다’는 것과 동일시하지만 사실 삶이란 생각이 아니라 겪음이며 경험이요 그 경험은 미지의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와츠는 거기에 ‘두려움’ 같은 낡은 이름을 붙이지 말고 물처럼 그냥 받아들이라고 권한다. 알지 못함을 두려워하는 대신 설렘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면 불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말은 맞는데 자신은 없다. 그래도 물처럼 살아야지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또 생각이냐 하면 할 말은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