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미래는 없다, 희망만이 있을 뿐! -주간경향

노바리 2013. 9. 29. 14:18

이반 일리치, 권루시안 옮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느린걸음, 2013

 

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하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독자로부터 왜 소통을 안 하느냐는 질책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독자들의 편지나 이메일, 댓글에 성의껏 답해온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지적이었지요. 유행하는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해서 소통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런 말을 들으니 내 방식대로 살기가 어려움을 알겠더군요. 근 십 년째 똑같은 휴대전화를 쓰는 것도 그렇습니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노인네도 안 쓰는 고물을 들고 다닌다고 혀를 차고, 친구들은 스마트폰을 기피하는 시대착오적인 제 생활방식을 걱정합니다. 휴대전화를 자주 바꾸면 아프리카 고릴라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고 하니까 남들처럼 살지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사냐고들 합니다. 사소한 일이지만 세상이 당연시하는 것을 벗어나 살기가 쉽지 않음을 실감합니다.

 

한데 최근에 나온 이반 일리치(1926-2002)의 책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를 읽다보니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살기 힘들었겠다 싶습니다. 세상이 당연시하는 상식이 그에게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일리치가 1978년부터 1990년 사이에 한 강연들을 모은 것인데 경제・교육・의료・언어 등 모든 분야에서 상식을 뛰어넘는 급진적인 내용들로 가득합니다. 책머리에 적힌 “미래는 삶을 잡아먹는 우상입니다. 우리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오직 희망만이 있을 뿐입니다.”라는 말부터가 그렇습니다. 모두가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고 외치는 마당에 미래가 없다니요! 그뿐이 아닙니다. 병원 수는 건강상태가 얼마나 나쁜지를 나타내고 학교 수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지표라며, 삶의 근간으로 여겨지는 의료와 교육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처음엔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어찌나 근본적으로 의심하는지 나중엔 좀 불편하더군요. 더구나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 삶까지 그렇게 살았다니 주눅이 들 정도입니다. 라틴어를 비롯한 열두 개 언어에 능통한 엘리트가 “학교 교육은 유전적 차이를 비틀어 퇴화를 이끌어내는 공인된 과정”이라며 학교 없는 사회를 주장하고, 의료시설이 오히려 건강을 위협한다면서 얼굴에 종양이 자라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자기 식대로 살다가 죽었으니 말입니다.

 

그의 책이 여럿 소개되었음에도 그의 사상이 덜 알려진 데에는 좌우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이런 철저함이 낯설고 버겁게 여겨진 탓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말처럼 과학과 성장의 논리를 추종하다 역사상 최악의 빈부격차와 환경파괴에 직면한 오늘날, 이 위기가 언제 어디서 시작했는지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입니다. 과거에 비춰봄으로써 지금은 당연히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 전까지도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게 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으니까요.

 

일리치는 초지도 길도 심지어 정적마저 공용이었던 시절이 그리 오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긴 어린 시절 동네 골목길은 우리들의 놀이터였고 엄마들이 푸성귀를 다듬으며 수다를 떨던 일터 겸 쉼터였지요. 할아버지들이 그 길에 장기판을 벌여도 빵빵거리며 비키라는 자동차도 없었고요. 하지만 이제 사람이 길에 앉거나 멈추면 야단이 납니다. 인클로저가 공용이던 초지를 영주의 사유물로 바꿈으로써 환경을 자원으로 만들었듯이, “길은 차량 유통을 위한 자원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권력과 자본의 확성기가 소리를 높이면서 정적을 누릴 자유도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드는 ‘필요’들을 탐내느라 삶도 죽음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 그뿐인 것은 아닐까요?

 

‘악한’ 사회 시스템에 절망하면서도 끝까지 인간된 책임을 다했던 사람의 목소리가 말합니다. 우리가 잃은 것을 보라고, 독립된 존재로 살 힘을 잃은 반편이 같은 자신을 돌아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