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아는 시골은 없다! -주간경향 8월
레이먼드 윌리엄스, 이현석 옮김, <시골과 도시>, 나남, 2013
아버지는 시골 출신이지만 농촌드라마를 싫어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드라마의 공식과도 같은 ‘제 잇속만 챙기는 도시 사람/ 인정 많고 순박한 시골 사람’이란 이분법을 싫어한다고 해야겠지요. 집 한 칸 없이 가난한 어린 시절, 야박하고 몰정한 시골 인심을 기억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일까요. 귀농, 귀촌이 대안적 삶으로 운위되는 요즘 세태가 저는 개운치 않습니다. 특히 하루가 머다 하고 TV에서 아름다운 전원주택을 배경으로 성공한 귀농인을 소개하거나 온 마을사람이 알콩달콩 가족처럼 지내는 모습을 비추는 걸 보면 아버지의 반감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물 맑고 공기 좋고 인심 좋은 시골에는 빈부의 차이도 노동의 일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을 매혹하는 평화롭고 한가한 풍경으로서의 시골만이 있을 뿐이지요.
이런 이미지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시골을 안빈낙도의 표상으로 그리며 전원의 소박한 행복을 노래하곤 했습니다. 실제의 시골은 양반 지주의 물적 기반으로서 안빈낙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말이지요. 문제는 문학과 삶, 상상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괴리를 당연시하는 시각 때문에 그 뒤에 감춰진 사회적 모순은 물론이요, 시골에 대한 전통적 이미지가 누구를 위해 만들고 조장되었는지 잊히고 말았다는 겁니다.
영국의 문화연구자 레이먼드 윌리엄스는 대표작 <시골과 도시>에서 오랫동안 잊혔던, 아니 한 번도 진지하게 탐구된 적이 없었던 그 질문을 던집니다. 그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교육을 받은 자신의 경험이 시골과 도시를 나누는 관습에 의문을 갖게 했음을 분명히 한 뒤, 둘을 대조하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 뒤에 숨은 실상은 무엇인지, 헤시오도스로부터 제임스 조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텍스트를 통해 분석합니다.
그가 맨 처음 문제 삼는 것은 농촌을 이상향으로 묘사하는 목가시의 전통입니다. 베르길리우스를 전거로 이상적인 농촌을 찬미하는 오랜 전통에 대해 그는 왜곡이라고 비판합니다. 베르길리우스의 <목가>는 토지를 잃을 위협에 처한 소농의 불안도 생생히 그린 반면, 이후의 목가는 농촌 내부의 노동과 분열은 도외시한 채 황금시대만을 노래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왜곡은 17,8세기를 풍미했던 ‘시골 저택시’에서도 확인되는데, 윌리엄스는 저택의 풍요를 찬미하는 그 시들에서 시골은 자연과 노동을 착취하고 도시는 그 착취의 결과를 실현하면서 동시에 시골을 착취하는 은폐된 관계를 읽어냅니다.
20세기 들어 도시가 지배적 경험이 되면서 도시와 시골의 관계도 달라집니다. 도시적이지 않은 생활양식이 비현실적인 것으로 취급되면서 시골의 의미는 축소되지요. 그러나 윌리엄스는 제국주의야말로 도시와 시골 관계의 세계적 재편이며, 정치적 제국주의는 끝났으나 저발전 국가들이 대도시적 선진 공업국들에게 식량과 원료를 제공하는 세계적인 도시-시골 관계는 변함이 없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시골에서 도시로의 발전을 당연시하는 근대화 모델이 이런 착취를 은폐한다고 비판합니다.
그렇다면 도시와 농촌, 인구와 자원의 위기가 심화되고 빈부격차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대안은 무엇일까요? 그는 시골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대신 도시와 시골의 분리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최고조에 달한 노동 분업, 경영과 현장의 분리, 정치와 사회생활의 분리가 거기서 기인했으니 그것을 극복해야만 위기를 해결할 수도, 위기 앞에서의 무력감을 떨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처음엔 그가 말했듯 너무 ‘기본’적인 문제제기 같았습니다. 하지만 “노동분업의 최후의 은신처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분열된 바로 여기”라는 말에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를 때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