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배우고 몸으로 겪는다! -주간경향, 4월
존 스타인벡, 이정우 옮김, 『찰리와 함께한 여행』, 궁리, 2006
마감이 코앞인데 머리는 멍하고 허리는 쑤시고, 때 아닌 꽃놀이를 즐기고 온 대가가 생각보다 큽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가는 게 아닌데, 뒤늦은 후회를 하다가 이게 다 책 때문이라고 책상에 놓인 책을 꼬나봅니다. 존 스타인벡의 『찰리와 함께한 여행』. 엉덩이 무거운 나를 부추겨 난생처음 밤기차를 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멀미가 심하고 길눈이 어두운 나는 여행을 떠나기보다는 여행을 꿈꾸기를 더 좋아하고 평소 여행서도 잘 읽지 않습니다. 가끔 TV나 책으로 남들의 여행담을 보아도 ‘참 좋다’ 할 뿐, 딱히 ‘가고 싶다,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지요.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무려 반세기 전에 나온 존 스타인벡의 미국 여행기를 읽고는 처음으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이 아니라 한국 여행을 하고 싶은 열망과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차올라 가만있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시원찮은 허리를 무릅쓰고 젊어서도 안 타본 밤기차에 오른 것입니다.
일이 그렇게 된 것은 첫째, 책의 서두에 적힌 다음과 같은 스타인벡의 고백 때문입니다. “미국에 관해서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이지만 나는 오직 책이나 신문을 통해서 미국의 변화를 알아왔을 뿐이다. 어디 그뿐이랴, 25년 동안이나 내 나라를 몸으로 느껴보질 못했다. 간단히 말해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써왔던 셈이다. 이른바 작가라면 이것은 범죄에 해당될 일이다.”
가슴이 뜨끔하더군요. 그동안 내가 사는 땅을,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것을 쓰는 죄를 지어왔구나 싶었지요. 더구나 쉰여덟이나 된 유명작가가 그런 반성을 하자마자 당장 여장을 꾸려 홀로, 아니,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넉 달간 총 4만 리가 넘는 대장정을 했다니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반성하고 경탄했어도 그의 여행기가 그저 그랬다면 써야 할 원고를 제쳐두고 무거운 몸을 일으키진 않았을 터. 스타인벡의 여행기는 여행지의 풍광을 담은 근사한 사진 한 장 없고 여행의 의미에 대해 그럴싸한 말 한마디 하지 않지만 나 같은 방안 풍수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보기 드문 여행서입니다.
이 책에는 여행서들에 으레 등장하는 경이로운 대자연의 풍경이나, 성선설을 믿게 만드는 드물게 착한 사람들이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여행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시야가 넓어졌다는 이들이 많은데 스타인벡은 그렇게 먼 길을 다니고도 미국에 대해 뭘 알게 되었다고 말하질 않습니다. 오히려 흑백갈등의 실상을 알기 위해 남부를 찾은 뒤 그는, “나는 도망치고 싶었다. 이것은 비겁한 태도였으리라. 그러나 더 비겁했던 것은 그 두려운 문제를 아예 부정해버리고 싶었던 내 마음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 나이에 그 명성이면 대가연해도 좋으련만 그는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와 비겁을 토로합니다. 이 오래된 여행기가 여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그가 50년 전에 부딪힌 문제나 내가 지금 직면한 문제나 오리무중이긴 마찬가지요 책에서나 길에서나 답을 찾기 힘든 건 똑같구나 하는 데에서 오는 쓸쓸한 위안이라고나 할까요. 어쩌면 그래서 더 떠나고 싶었나 봅니다. 그와 내가 크게 다르지 않으니 나도 그처럼 길 위에 서면 더 겸손하고 너그러운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게 생긴 것이지요.
그리하여 소심하고 게으른 나는 스타인벡처럼 대장정에 나서는 대신 짧은 남도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우리 땅, 우리 이웃의 속살을 보기엔 턱없는 발걸음이지만 이제부터 조금씩 발품을 팔면 배우는 게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여행이 좋아도 싸고 편하고 후유증도 없는데다 이처럼 여행의 길잡이까지 해주는 책을 대신할 수는 없으니,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앞으론 책으로 배우고 몸으로 겪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