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라고 믿는 나는 누구인가? -주간경향
로라 커밍, 김진실 옮김, <화가의 얼굴, 자화상>, 아트북스, 2012
서랍 정리를 하다가 중학생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쓴 일기장을 발견했습니다. 공부를 잘하진 못했어도 열심히 읽고 고민했던 사춘기, 회색인을 자처하며 방황하던 대학 시절을 떠올리며 일기장을 넘기는데, 웬걸요? 일기장 속의 나는 기억 속의 나와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기억 속의 나는 나이보다 성숙해서 성적보다는 삶과 죽음을 고민하고 유치한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없어 외로운 청춘이었으나 일기장 속의 나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허구한 날 성적 걱정을 하고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받고 앞집 남학생을 짝사랑하느라 여념이 없는 데다 글씨는 또 어찌나 괴발개발인지! 특별할 것 하나 없이 평범한, 아니 오히려 좀 모자라고 유치한 내 모습이 놀랍고 서먹합니다. 내가 ‘나’라고 여겼던 ‘나’는 기억의 조작일 뿐, 실제의 ‘나’는 내가 아는 ‘나’와 전혀 다른 존재였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생각하면 다른 것은 기억 속의 ‘나’만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머릿속으로 ‘나’라고 떠올리는 존재와 거울 속에서 마주하는 ‘나’라는 존재 사이에도 닮은 점은 찾기 힘듭니다. 그뿐인가요, 아침에 보는 나와 저녁에 보는 내가 다르고, 남이 보는 나와 내가 보는 내가 또 다릅니다. 내가 이렇듯 여럿이라면 그 중에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아니, 진짜 나라는 것이 있기는 있는 걸까요?
영국의 미술평론가 로라 커밍이 쓴 <화가의 얼굴, 자화상>은 자신의 진짜 정체에 곤혹스러워하기는 위대한 화가들도 마찬가지였음을 보여줍니다. 수백 년간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다양한 형태의 자화상들은, 자기를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케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대상인 자신을 똑바로 바라봐야 하는데, 거울 속의 자신과 눈싸움을 해본 적이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한 일인지 알 겁니다.
더구나 그렇게 자기-직시에 성공했다 해서 자화상의 성공이 보장되는 것도 아닙니다. 자화상을 보는 다른 시선들, 자신을 보는 타인의 시선을 고려해야 하니까요. 이때 타인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면 대개의 자서전들이 그렇듯 자신이 보여주고픈 이상적 자아에 매달려 실제 자신의 모습을 왜곡하기 십상입니다. 자서전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자화상은 왜곡의 정도가 덜하긴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붙들려 자신을 놓치는 예는 드물지 않습니다.
이 책에 실린 노먼 로크웰의 「세 명이 있는 자화상」은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유쾌하게 드러냅니다. 로크웰은 여기서 하나의 내가 아니라, 빼꼼 거울을 들여다보는 ‘나’와 그렇게 비친 나를 그리는 ‘나’와 화폭에 담긴 그럴싸한 모습의 ‘나’까지 세 명의 나를, 아니 그림에 드러나진 않지만 관자[그림 보는 이]에겐 보이는 그 자화상을 그린 ‘나’까지 네 명의 나를 표현합니다. 그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자아, 자신의 허영에 도취된 자아, 그것을 비판적으로 관조하는 자아, 그리고 그 모두가 '나'의 일부임을 담담히 인정하는 자아까지 담아내고 이를 통해 진짜 ‘나’를 찾으려는 노력이었지요. 툭하면 자아도취에 빠지기 일쑤인 저로선 자기연민이나 자아도취 없이 스스로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화가의 자화상을 보니 공감 어린 반성을 하게 되더군요.
흔히 자화상을 다룬 책들이 그림 자체보다 화가의 생애나 심리에 치중해 자화상을 읽어내는 것과 달리, 로라 커밍은 이 책에서 그림 자체를 꼼꼼히 분석합니다. 덕분에 고독과 불운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고흐의 자화상을 보며 왜 내가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지도 납득이 되고,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이 왜 늘 똑같은 얼굴이었는지도 새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과장없는 담담하면서도 예리한 설명과 함께 수많은 자화상들을 보면서 오히려 뛰어난 화가든 평범한 저 같은 사람이든 무릇 사람이란 이상과 현실, 도취와 환멸 사이를 오가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지요.
책을 읽기 전에는 자신을 성상으로 내세운 뒤러의 이상화된 나, 회개하는 죄인의 가죽이 된 미켈란젤로의 그로테스크한 나, 고통을 과장하는 트레이시 에민의 자기연민에 빠진 나를 보며 나와는 다르다 여겼습니다. 한데 이젠 그리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얼굴, 다른 인생을 살았지만 열망에 달뜨고 절망에 기진하기는 그들도 나도 똑같아서, 그들의 자화상에서 나를 봅니다. 그리하여 바라건대 내 노년에는, 엄격하되 너그럽고 한없이 깊은 렘브란트의 자화상(119쪽)에서 나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몽테뉴의 말처럼 “모든 모순이 내 안에 존재”하거늘, 지금 이 순간의 나도 모르는데 노년의 나를 어찌 장담하겠는지요. 그저 솔직히 나와 대면하는 용기를 가진 인간으로서 감히 자화상을 그릴 엄두라도 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