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이름으로 식민화된 입양아 -주간경향 북리뷰
『인종간 입양의 사회학』, 토비아스 휘비네트 외 지음, 선영 신 외 엮음, 뿌리의집, 2012
정기적으로 서평을 쓰는 터라 좋은 책을 찾기 위해 일간지와 잡지의 서평들을 챙기고 가끔 서점 나들이도 합니다. 하지만 서점에서 눈에 띄는 책이나 매체에서 소개하는 책들은 대개 유명 출판사와 작가들에 편중되어 겹치기 출연이 많습니다. 그래서 매주 두세 군데 도서관을 찾아가 신간 코너를 둘러봅니다. 출판사, 작가, 디자인 따위에 대한 불안 혹은 불만을 잠시 접어두고 책장을 넘기다보면 뜻밖의 양서를 만나는 일이 드물지 않지요. 『인종간 입양의 사회학』도 그렇게 만난 책인데, 도서관이 아니었더라면 나온 줄도 몰랐을 겁니다.
여러 신간들 중 600쪽에 달하는 이 두꺼운 책에 손이 간 이유는 ‘인종간 입양’이라는 낯선 용어 때문이었습니다. 해외입양이란 익숙한 말 대신 왜 이런 신조어를 쓰나 싶었는데 생각해보니 해외입양의 태반이 백인 부모가 유색인 아이를 입양하는 인종간 입양이더군요. 다인종국가인 미국 같은 경우 국내입양도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져서, 유색인 부모가 백인 아이를 입양하는 일은 거의 없고 강한 반대 때문에 성사되기도 어렵다고 합니다. 사랑의 행위로만 보이는 입양조차 인종주의의 그늘 아래 있는 셈이지요. 인종간 입양이란 용어는 이런 현실을 직시하며 인종을 초월한 가족애로 그려져 온 입양의 실상을 드러냅니다.
‘사랑은 피부색을 보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상식을 거부하고 불편한 입양의 실상을 증언하는 이들은 당사자인 인종간 입양인들입니다. 이 책의 편집자들과, 책에 실린 30편의 글 중 25편을 쓴 이들이 모두 인종간 입양인들로, 그들은 지금까지 이 주제에 대해 발언한 입양부모와 학자들, 사회복지사들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무엇보다 “입양이 국경과 인종을 넘어서 도움이 필요한 아동들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제공”한다는 낯익은 신념을 그들은 식민주의와 인종주의에 기초한 환상이라고 일축합니다. 대신 그들은 “문화적 말살”을 위해 인종간 입양을 추진한 인디언 입양의 역사를 고발하고, “입양 대상 아기들 사이에 인종적 계급이 있다”는 데 주목하며, 자신의 경험에 비춰 “입양아동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식민화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입양부모의 차별과 학대 때문은 아닙니다.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이 입양 부모의 무지와 우월의식, 학대의 경험을 폭로하지만, 어려운 여건에서도 사랑으로 아이를 품은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도 적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랑과 헌신에도 불구하고 입양된 아이들은 그 사회에서 “멋진 삶”을 누리지 못한 채 “내부의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다는 겁니다. 유색인 동생을 둔 백인 누나의 말처럼, “우리 가족이 아무리 잘해 주려 애써도 그때뿐, 동생은 주변의 제도적 인종차별과 부딪쳐야 했”던 거지요. 인종간 입양 자체가 야만의 이방인을 구원한다는 인종주의에서 발로했음을 떠올리면 이는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서구중심적 입양 담론이 확대 재생산되는 데는 한국 같은 유색인 입양아동의 모국들도 한몫했습니다. 한국 출신 입양인 토비아스 휘비네트가 지적하듯이, 지난 60여 년간의 해외입양 역사에서 한국은 입양 아동의 1/3을 공급하며 맹활약했지요. 특히 전체 해외입양 건의 3/4이 집중된 박정희 정부와 전두환 군사정권 시대는 해외입양의 황금기였습니다. 이를 통해 정부는 사회복지의 부담을 덜고 소외 빈곤계층을 가부장제와 “우생학의 이름으로” 관리해 권력을 유지했으며, 입양기관들은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지요.
책을 읽고 나면 해외입양이 군사주의,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관철되는 방식의 일부라는 필자들의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그리고 근 20만 명의 아이들이 해외로 송출되는 걸 못 본 척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은 뒤 다시 책을 산 것은 그래서입니다. 읽고 사고 서평이라도 써서 면피하려는 심정, 당신도 읽으면 아실 겁니다.
**11월부터 <주간경향>에 서평 연재를 시작했다. 연재 두 개, 벌써부터 후회가 되지만 어쩌랴. 이참에 열심히 공부나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