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는 풍경

도서관에서

노바리 2012. 5. 25. 21:36

며칠 전 오랜만에 마포평생학습관을 찾았다.

예전엔 자주 찾던 도서관인데 타고 다니던 버스가 노선을 연장하면서 배차시간도 덩달아 늘어나는 바람에 걸음이 뜸해졌다.

이곳엘 오면 도서관에 들어가기 전 바로 앞에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집에서 카푸치노를 사는 게 나만의 룰이다.

이 날도 들고간 컵을 내놓고 주문을 하려는데 아가씨가 먼저 "카푸치노, 우유 적게 하시죠?" 한다.  

퍽 오랜만인데도 식성까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아가씨가 놀라워서 어떻게 그걸 다 기억하냐니까 "그 정돈 알아야죠." 하며 웃는다.

성실한 직업정신에 감탄사가 절로 나오고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때, 한 아주머니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언니야!" 하며 다가온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한테 어머니라든가 언니 같은 호칭으로 불리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더구나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따지듯 "언니야" 하고 부르니 그리 달갑지가 않다.

하지만 뭔가 물으려는 사람을 외면할 수도 없는 터. 내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분은 여전히 찌푸린 낯으로 투덜투덜 혼잣말을 하면서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언니야, 여기 어디에요?"

작은 종이에 뭔가가 잔뜩 메모가 되어 있는데 맨 위에 '마포평생학습관'이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전화번호 같은 숫자들이 써 있었다.

"바로 여기에요."

나는 손가락으로 가게 바로 뒤에 있는 학습관 쪽을 가리켰다. 아주머니는 고맙다거나 그런 말 한마디 없이 그쪽으로 갔고 나는 커피값을 계산했다.

그리고 학습관으로 들어서는데 바로 앞에 서 있던 아까 그 아주머니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로 내게 물었다. "아까 말한 여기가 어디에요?"

아니, 바로 앞에 서서 그걸 왜 찾는담.

답답했지만 다시 "바로 여기요." 하고 건물을 가리키자 그분은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내가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그분은 다시 나타나서 "여기가 어디에요?" 하며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마포평생학습관 찾으신다면서요?" "예." "여기가 거기에요." "에?"

찌푸린 낯이 거의 울상으로 변하는 걸 보고 "어디 찾으시는데요?"

조금 상냥하게 물었더니 "식당"이란다.

식당은 지하라고 일러주고 자료실로 올라가는데,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 때마다 기분이 점점 가라앉는다.

초라한 입성에 찌푸린 낯, 제대로 갖추지 않는 예의범절 따위를 들어 그분에게 데데하게 굴었던 내 자신이 떠오른다.

아마도 그분은 한글을 읽지 못했던 모양인데...

누군가 대신 적어준 종이를 들고 초행길을 더듬는데, 젊고 바쁜 대학생들에게는 차마 묻지 못하고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에게 기껏 물었더니 돌아온 것은 불친절하고 퉁명스러운 대답. 약속시간은 늦고 어딘지는 모르겠고, 답답하고 속상한 마음이 어땠을지.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더니 그 아주머니가 설거지를 하고 있다. 눈이 마주쳐도 여전히 찌푸린 얼굴. 인사를 하려다가 끝내 못했다.

 

매일 도서관에 가고 온갖 책들을 읽었지만 정작 내게 다가온 한 사람의 사정도 제대로 읽지 못한 내가 한심하다.

세상 모두가 나 같으려니, 아니, 나와 같아야지 하는 오만한 마음으로 살고 있음을 새삼 깨닫는다.   

책이 오만을 키우는 거름이 될 뿐이라면 책을 읽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 오만을 키우고 퍼뜨릴 욕심으로 쓰는 책이라면 더이상 글을 써서도 안 되는데,

늘 이 모양. 책은 왜 읽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