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 ④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다니엘 네틀․수잔 로메인, 김정화 옮김, <사라져가는 목소리들>, 이제이북스, 2003
플로베르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앵무새에서 브라질 카팅가 숲의 앵무새로 이어졌던 지난번 연쇄독서탐사기를 마무리할 즈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책은 인간이 사라진 뒤의 세계를 그린 <인간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앵무새가 살 수 없을 만큼 세상을 위태롭게 만든 주범인 인간이 사라진다는 설정 자체가 통쾌하기도 하고, 또 정말 인간이 없어지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 궁금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연쇄를 이어가는 건 좀 뻔하다고 할까, 앵무새가 사라졌으니까 이번엔 인간 차례라면 너무 단순한 것 같더군요. 배배 꼬인 성격 탓인지, 독자 입장에서 ‘어라, 왜 이런 연쇄가 일어났지?’ 하고 한번쯤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연쇄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른 책은 진화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다니엘 네틀과 언어학자인 수잔 로메인이 함께 쓴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이라는 책입니다.
지난번 <스픽스의 앵무새>가 멸종 위기에 놓인 앵무새 이야기라면, 이 책은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 이야기입니다. 즉, 생물종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언어도 그만큼 빠르게 사멸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책이지요. 책을 읽어보면 두 책이 서로 다른 내용을 다루지만, ‘멸종’이라는 주제만이 아니라 무섭고 슬픈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테비크 에센크, 붉은천둥구름, 로라 소머설, 아서 베넷, 네드 매드럴, 로신다 놀라스케스. 이 사람들이 누구냐고요? 바로 한 언어의 마지막 생존자들입니다.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사는 곳도 모두 달랐지만, 그들이 죽으면서 그들이 쓰던 언어도 함께 죽었다는 운명만은 똑같은 사람들이지요. 아마존 숲에서 홀로 13년을 살았던 스픽스유리금강앵무처럼, 그들은 침묵 속에서 홀로 자신의 모국어를 간직하다가 그 언어를 데리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책을 읽으며, 그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합니다. 요람에서부터 배운 말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때, 내가 쓰던 말이 세상에서 오직 나 하나만이 쓰는 말이 되었을 때, 그 마음이 어땠을까? 알래스카의 마지막 에야크 인디언이며 유일한 에야크어 사용자인 마리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왜 나인지, 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건지 나는 몰라요. 분명히 말하지만, 마음이 아파요. 정말 마음이 아파요…….”
그게 왜 나인지, 왜 내가 이런 운명을 겪어야 하는지, 아마 홀로 남겨진 스픽스의 앵무새도, 최후의 한 사람과 함께 사라진 우비크어(語), 쿠페뇨어, 와포어, 맹크스어, 음바바람어도 묻고 싶을 겁니다. 그들이 택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너무나 갑작스런 죽음이었으니까요.
그것이 자연스러운 죽음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하기 위해 이 책의 필자들은 ‘언어 살해’라는 표현을 씁니다. 캘리포니아의 인디언 야히족 언어가 백인들의 살육으로 종말을 맞고, 테비크 에센크와 함께 사라진 우비크어가 러시아의 대학살로 사멸에 이른 것처럼, 수많은 언어들이 정복과 탄압으로 죽음을 맞았으니 ‘살해’라는 것이지요.
물론 사멸했거나 사멸 위기에 놓인 언어들이 전부 ‘살해’된 것은 아닙니다. 개중에는 아일랜드 작가 플랜 오브라이언의 말처럼 사용자들이 스스로 내버려 ‘자살’에 이른 언어도 있고 (만약 영어공용화를 주장하는 이들의 뜻대로 이 땅에서 영어가 국어(國語)가 된다면 한국어는 ‘자살’한 셈이 되겠지요.), 인도네시아의 탐보란어처럼 화산 폭발로 사용자들이 모두 죽는 바람에 사멸한 언어도 있습니다.
하지만 100대 언어 사용자가 세계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나머지 6천 개의 언어를 세계의 최변방에 사는 10퍼센트만이 사용하는 상황2)에서, 자살이나 천재지변만으로 언어의 다양성이 실종되는 현실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건 모든 언어가 살해당한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언어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런 죽음을 당연시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은, 다중언어는 분열을 조장하며 비효율적이므로 하나의 언어로 통일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합니다. 또 영어 같은 몇몇 언어가 세계적인 지배어가 된 것은 적자생존에 따른 자연스런 결과이므로 문제될 것 없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한국어 ‘자살’을 주장하는 영어공용화론자들의 논리와 흡사한 주장이지요.
그러나 필자들은 하나의 단일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정치적 단합은 이루지도 못하는 나라가 얼마나 많으냐고 반박합니다. 또한 영어가 지배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조건에서 경쟁한 결과가 아니라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자원불균형에서 생긴 것이므로, 불평등한 사회구조로 인한 언어 살해를 막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이들이 언어의 죽음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의감이나 도덕심 때문이 아니라 언어 자체가 가진 가치 때문입니다. 언어에는 인간이 자신의 경험을 체계화하고 분류하는 창조적인 방식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창(窓) 하나가 영원히 닫히는 것을 뜻합니다. 뿐만 아니라 언어에는 자연환경에 대한 상세한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열대우림이나 극지방에 사는 토착민들은 언어를 통해 자신의 지식을 구전해왔는데, 그 언어가 사라지면 첨단의 과학도 알지 못하는 그 지식도 사라지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책의 제3장에는 흥미로운 예가 나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약 5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는데, 그곳 원주민들의 구전 설화에 따르면 옛날엔 본토에서 산호해의 섬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서구 과학자들은 20세기가 될 때까지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연구 끝에 비로소 지리학자들은 마지막 빙하기 말엽에 산호해 섬들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해수면이 낮았을 거라고 추정하게 되었지요. 만약 서구 과학자들이 원주민의 설화에 일찌감치 귀를 기울였다면 지구 진화의 비밀을 좀더 일찍 알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른바 ‘문명인’들은 “토착 언어와 문화를 원시적이고 후진적이라고 무시하면서 그것을 서구의 언어와 문화로 대치하는 것이 현대화와 진보의 선행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선진국들은 이런 믿음 아래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신들과 같은 중앙집권적 국민국가 체제를 강요하고, 유럽식 단일영농, 서구식 교육 등을 실시하도록 추진해왔습니다. 그 결과 세계의 부는 증가했습니다. 그러나 필자들이 지적하듯이, 그 부는 부자들, 특히 선진국 부유층에게 집중된 부였습니다. 즉, 파이의 전체 크기는 커졌지만 그걸 먹은 사람은 소수의 부자였을 뿐, 그걸 키우기 위해 삶의 터전을 내주고 말과 행동까지 바꾼 사람들은 파이는 구경도 못한 채 자기 땅에서 내몰렸던 것이지요.
미셸 푸코가 말했듯이 지식은 권력입니다. 그리고 언어는 지식을 전달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그러니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언어를 통제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마치 식민지 엘리트들이 독립이 된 뒤에도 식민본국의 언어를 표준어로 정해 민중을 지배한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필자들은 토착어와 다중언어 사용을 옹호합니다. 중심부 지배층이 변방의 주민과 언어들을 죽음으로 내몰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지요.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은 사멸하는 언어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 언어보다도 정치, 경제, 역사, 생물학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이 나옵니다. 심지어 신석기 농업혁명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농업 발전의 역사를 더듬을 정도입니다. 언어학에 관한 책이 왜 이럴까 이상할 수도 있지만, 언어생태학을 주장하는 필자들에게는 당연하고 자연스런 일입니다. “희귀 생물이 생태계에 얽혀 있듯이 언어 역시 사회적․지리적 기반에 얽혀” 있으므로, 사멸하는 언어를 살리기 위해서는 생태계를 살려야 하기 때문이지요.
희귀 앵무새를 살리기 위해서는 동물원의 앵무새를 잘 키우는 것보다 앵무새의 서식지를 보존하고 새가 자연에서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듯이, 언어를 살리기 위해서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언어를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생태계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건 그래서입니다. 좀 길지만 다음 인용문은 언어생태학적 관점에서 언어의 보존이 왜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언어와 문화들의 사멸을 방치하면 이 세계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총량이 직접적으로 줄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풍부함과 다양함을 이야기하던 목소리들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종이 멸종하면 환경의 어느 고유한 부문도 함께 희생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목소리들이 하나하나 사라지면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누구인지,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를 조금씩 잃게 된다.”
유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해마다 약 2만 7천 종의 생물들이 멸종되고 있다고 합니다. 1시간에 약 3종이 사라지는 셈입니다. 생물학자들은 특히 금세기에 멸종은 더욱 가속화되어 전 세계 생물종의 절반이 죽음을 맞을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이런 비관적인 전망은 생물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재 6천 개가 넘는 언어 중 절반 이상이 21세기 안에 사멸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생물종과 언어들, 그것은 우리를 살게 해준 세계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주던 목소리들입니다. 그 세계가 죽고 그 목소리가 사라진 뒤, 과연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사라져가는 목소리들>에는 한때 번영을 구가했으나 어느새 아무도 쓰지 않아 죽어버린 말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쓰는 한국어도 일본의 지배가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그대로 죽어버렸을 겁니다. 아니, 지금처럼 영어에 목을 매다간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한국어도 멸종 언어에 이름을 올릴 겁니다. 그리하여 죽은 시인이 노래했듯, 우리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지는 날이 오겠지요.
물론 입을 떠나면 말은 흩어지고 그 무엇도 영원을 약속할 순 없습니다. 그래서 말을 붙잡아 돌에 새기고 문자를 만들어 훗날을 기약하는 것이고요. 허나 돌에 새긴 글이 천년을 간다 해도 그걸 소리 내 읽어줄 목소리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생물학과 언어학, 인류학과 정치경제학을 오가는 이 야심만만한 저작이 보여주는 건 그것입니다. 말은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이고 글은 그 말의 뒤를 좇는 그림자라는 것. 그러므로 아무리 많은 글을 남긴다 해도 함께 나눌 말이 없다면, 아니, 말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그 삶은 캄캄한 침묵에 머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이제 더는 우리를 부르던 목소리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우리가 살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