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칼럼

부끄러움을 아는 지식

노바리 2010. 9. 4. 10:15

뉴스를 안 본 지 여러 날째다. 안 그래도 비관이 몸에 익어 걱정인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모양이 한숨을 부르니 어쩔 수가 없다. 뉴스를 장식하는 하나하나의 비리나 실정이 문제가 아니다. 정치를 하는데 어찌 늘 잘할 수만 있으랴. 잘하려고 시작했다가 잘못되기도 하고 바로잡으려다 그르치기도 하는 것이 세상사임을 모르지 않는다. 알면서도 참을 수 없는 것은 실수와 실정이 아니라 실종이다. 예의와 염치, 상식과 도리의 실종이 말문을 막고 눈을 감게 만든다.

 

시속(時俗)에 지쳐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옛 책만 한 것이 없다. 비바람 요란한 창 밖을 등지고 앉아 오래된 책을 읽는다.

 

“머리 둘 달린 뱀과 꼬리 아홉 달린 여우는 지독히 악한 것이지만 현명한 사람은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옷으로 몸을 꾸미면서 똑똑한 척하고 남을 헐뜯기 잘하는 자는 현명한 사람도 피하지 못한다. 이는 비방하는 자의 유언비어 때문이니 유언비어를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가 쓴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한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세상은 별 다르지 않구나 싶으니 쓸쓸하면서도 위안이 된다.

 

서얼 출신의 가난한 서생이었던 이덕무는 출세는커녕 좋아하는 책조차 마음 놓고 보지 못할 만큼 궁색한 세월을 살았다. 하지만 그런 중에도 그는 독서를 쉬지 않았으며, 밝은 지식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으리란 포부를 버리지 않았다. 아마도 그런 포부가 있었기에 궁벽하고 울울한 처지에도 세상을 원망하고 남을 탓하며 세월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미관말직 한 자리 얻지 못한 채 사는 것이 쉬웠을 리 없다. 더구나 “도리에 어긋난 행동을 보면 가슴에서 혈기가 솟구쳐 당장 손을 들어 치려 할” 만큼 불같은 성격으로 묵묵히 세상의 불의를 보아야 했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으랴. 긴 문장들 사이에서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곳으로 사람을 이끌지 말라”는 짧은 문장을 본 순간, 그 속내를 엿본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하다. 

 

다행히 39세 되던 해, 그는 정조 임금의 발탁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되어 관직에 나아갈 수 있었다. 비록 9품에 불과한 말직이었지만 책을 좋아하는 이덕무에게 왕실도서관 규장각의 검서관은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울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그는 혼신을 다해 맡은 일을 했고, 누구보다 꼼꼼한 그 덕분에 <규장전운> <무예도보통지> 같은 특별한 책들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었다. 

 

이덕무는 책을 편집할 때는 오자 하나도 허용치 않았고, 책을 읽을 때는 읽은 대로 실천하고자 최선을 다했으며, 책을 쓸 때는 정확한 표현으로 거짓 없는 내용을 전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책 읽는 자의 도리이며 책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책 읽은 자들이 앞장서 도리를 저버리고 교묘한 말솜씨로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보며, 읽은 대로 살아야 한다고 믿었던 이 엄정한 독서가를 떠올린다. 어쩌면 생전의 그를 두고 무능한 원칙주의자라 비웃은 이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 글과 삶이 그 이름과 함께 또렷이 빛나는 것은 그가 빈궁 속에서도 놓치지 않았던 엄격함과 결기 때문이리라.

 

“문밖을 나서면 모두 아름답지 못한 일이고 책을 펴면 부끄러움 아닌 것이 없다”고 탄식하는 이에게, 이덕무는 정말 부끄러운 일은 책을 읽고도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답하였다.

비바람 부는 오늘, 세상에 도움이 되는 지식, 부끄러움을 아는 지식이 간절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