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여름날의 독서 - 『처녀귀신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노바리 2010. 7. 6. 17:31

밤에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면 괜히 주위를 둘러보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심각한 폐소공포증이 있는 건 아니지만 여러 가지 귀신 이야기가 떠올라 오금이 저리는 건 사실입니다. 며칠 전엔 대여섯 살쯤 된 아이와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엘리베이터가 잠깐 덜컹하자 아이가 귀신이 있냐고 진지하게 묻더군요. 아이의 정신건강을 생각해서 절대 없다고 대답을 하긴 했지만 속으론 ‘혹시 모르지’ 했습니다. 저는 귀신을 본 적이 없지만 귀신을 봤다는 사람은 한둘이 아닌 데다 세상에 별별 일이 다 있는데 귀신이 없으란 법도 없지 싶습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따지면 귀신이 있다 해도 그리 무서운 존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귀신의 힘이 산사람을 못 당하니 말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이 귀신이 된다고 하면, 제 욕심을 위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는 귀신의 등쌀에 못 이겨 제 명에 못 죽어야 할 것 같은데 현실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으니까요.


옛날이야기를 봐도 귀신 때문에 죽는 사람은 원한을 산 당사자보다 겁 많은 원님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왜 옛날 귀신들은 자기를 괴롭힌 원수 앞에 안 나타나고 아무것도 모르는 원님 앞에 나타나서 애꿎은 사람을 혼비백산하게 했을까요? 국문학자 최기숙에 따르면 그것은 여자 귀신에게만 해당되는 행동패턴이며, 그런 행동패턴이 나타나는 이유는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대부 남성들의 의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귀신 이야기에 이런 속내가 있었다니! 구미가 당겨서 단숨에 읽은 책, 최기숙의 『처녀귀신』입니다.


귀신은 죽은 사람이지만 죽은 사람이 모두 귀신이 되는 건 아닙니다. 이승에 미련과 한이 남아 현세를 떠나지 못한 자만이 귀신이 됩니다. 거기에 또 하나, 산 사람에게 목격이 되어야 비로소 귀신으로 인증을 받습니다. 설사 공동묘지에서 밤마다 귀신들이 반상회를 한다 해도 산 사람이 모르면 귀신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니까 귀신이란 죽은 자로서 산 자들의 세계에 들어온 자, 생과 사의 경계에서 “죽은 뒤에도 잠들지 못하는 욕망과 의지”를 드러내는 존재입니다.


조선 후기 야담집에 실린 귀신 이야기를 분석한 이 책에서는 귀신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하나는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는 귀신이고, 다른 하나는 억울하게 죽은 원귀(寃鬼)입니다. 옛 이야기 속에서 전자는 예외 없이 남자고 후자는 여자입니다. 즉, 남자 귀신은 조상신으로 등장해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반면, 여자 귀신은 ‘원귀’나 ‘자살귀’로 나타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야담집에 실린 귀신 이야기 중 양적으로는 남자 귀신 이야기가 많지만 인기가 있는 것은 여자 귀신, 특히 처녀귀신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인기의 요인은 성적 신비감을 비롯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침묵하던 여자들의 속내를 들을 수 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일 겁니다.


조선 사회에서 지배층으로, 아버지로, 남편으로 수없이 자기 이야기를 해온 남성들과 달리, 여성들은 남성의 말을 듣고 따를 뿐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귀신 이야기는 그런 침묵 속에 담긴 ‘한’을 그녀들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긴장과 해원(解寃)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합니다.


캄캄한 밤, 갑자기 한줄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 방안에 촛불이 꺼지고 소복을 입은 귀신이 등장합니다. 모두들 귀신을 보고 혼비백산하지만, 막 부임한 수령은 태연히 귀신을 상대하지요. 처녀귀신은 그에게 억울한 사연을 고하며 한을 풀어달라고 청합니다. 이야기는 수령이 악한을 처벌하고 억울하게 죽은 처녀귀신을 양지 바른 곳에 묻어 한을 풀어주는 것으로 끝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처녀귀신 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구조를 갖습니다. 귀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 만큼 원한에 사무치면서도 처녀귀신들은 직접 복수를 하지 않고 남성 사대부에게 하소연만 합니다. 자신에게 해코지한 당사자 앞에 나타나면 일이 쉽게 해결될 텐데 참 이상하지요.    


최기숙은 그 이유를 야담이라는 장르의 속성에서 찾습니다. 귀신 이야기가 실린 야담집은 사대부가 여가에 읽는 독서물이었습니다. 야담을 모아 쓴 사람도, 그것을 읽는 사람도, 사대부 남성이 주를 이루었지요. 그러니 당연히 담력과 지혜를 갖춘 양반 관리가 나서서 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요. 만약 여자 귀신이 직접 치죄(治罪)를 한다면 현실에서 남성 관리가 설 자리는 없어지고, 그들이 내세우는 현실의 법도 무력해질 겁니다.

 

이야기 속에서 처녀귀신은 ‘탄원자’가 되고 양반 남성은 ‘해결자’가 되는 이유는 그래서입니다. 귀신 이야기에도 읽고 쓰는 사람의 의도, 나아가 현실의 권력관계가 담겨 있는 셈이지요. 그러나 비록 왜곡이 있다 해도 귀신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회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필자는 말합니다. “귀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사회가 소외시키고 배제시킨 대상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발설하는 증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말처럼, 사회의 모순이 있는 한 귀신도, 귀신 이야기도 영원히 계속될 겁니다. 그렇긴 해도 귀신은 역시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학생 귀신은 정말 무섭습니다. 「여고괴담」 시리즈부터 「고死:피의 중간고사」까지 최근에 인기 있는 공포영화들은 하나같이 학교가 무대입니다. 혹 이것이 침묵을 강요당한 채 공부로만 내몰린 아이들의 귀곡성을 반영한 것이라면, 귀신을 부를 만큼 무서운 교육 현실이 표현된 것이라면……. 아,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