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연재칼럼

그들의 절망을 연민하라

노바리 2009. 11. 4. 21:34

여중, 여고를 거쳐 여대에 들어갔을 때 대학생이 된 걸 축하한 이들은 가족뿐,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 처지를 가엾게 여겼다. 학교 앞에 책방은 두 갠데 옷가게는 백 개가 넘는 학교를 어떻게 다니느냐며, 골 빈 여대생들과 함께 생활해야 할 나를 안쓰러워하고 남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를 잃은 것을 동정했다. 친구들의 말이 아니라도 나 역시 책은 안 읽고 모양이나 내는 ‘여대’생이 된 게 부끄럽고 싫었다. 입학한 그날부터 휴학을 하고 다시 입시 공부를 할까 고민도 했지만 지긋지긋한 그 공부를 다시 할 자신이 없었다.

별 수 없이 입이 댓 발이나 나와서 우울한 신입생 시절을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교육학 수업 시간, 중년의 여교수님은 교육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십 년 넘게 철학을 공부하다가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남녀를 아우른 인간(Human)이 아니라 남성 인간(Man)일 뿐이라는 걸 깨달았고, 그래서 여성까지 포함한 인간학을 하기 위해 뒤늦게 교육학을 시작했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 여자로 태어나 여자 학교를 다니며 여자로 근 이십 년을 살았지만 ‘내가 여자구나!’라고 느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여성으로 사고하기보다는 인간으로 사고하는 데 익숙하던 나에게, 교수님의 말은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세상이 생각하는 인간이 다를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여성인 내가 생각하는 인간과 남성인 그가 생각하는 인간이 다를 수 있다는 것, 그건 놀랍고 섬뜩한 깨달음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남녀가 함께 어울리는 세상에 나왔을 때 그 깨달음은 현실이 되었다. 비일비재한 성적 모욕과 차별의 태반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장난이거나 실수였는데, 그래서 더 괴로웠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고 있었고, 그것이 잘못임을 일깨우면 무안해하거나 화를 냈다. 모르고 짓는 죄가 가장 무섭다더니 과연 그랬다. 자신이 죄를 지은 줄 모르니 반성을 할 수도, 교정을 할 수도 없었다. 잘못은 거듭되면서 구조가 되었고, 구조는 다시 차별을 합리화했다.

얼마 전 신문에서 한국의 20대 여성 자살자 수가 유례없이 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계적으로 자살은 여성보다 남성이 2배 정도 많은데 최근 들어 한국에선 20대 여성의 자살이 부쩍 늘어서, 2008년 20대 자살자 1574명 중 여성이 802명으로 772명인 남성보다 더 많다는 것이었다. 그 전해와 비교하면 남성은 24명이 줄어든 반면 여성은 48명이 늘어난 수치였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여자들은 군대도 안 가면서 왜 그 젊고 아름다운 나이에 죽음을 택하는 것일까?

한국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83%로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들 중 1위지만, 대졸 이상 학력자 중 일하는 여성은 59%로 최하위 수준이다. 더구나 그 셋 중 둘은 비정규직이고, 월급 역시 남성의 61%에 불과하다.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남자와 똑같은 인간인 줄 알고 공부했지만 막상 사회에 나와서 인간이라 해도 다 같은 인간이 아님을 알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 혹 그 절망감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닐까.  

20대건 60대건, 여성이건 남성이건 삶이 무겁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 무겁고 가벼움을 따지기 전에 같은 짐을 진 존재로서 서로를 연민하는 것, 그것이 인정(人情)이리라. 내가 생각하는 사람과 당신이 생각하는 사람이 다르지 않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