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녀의 숨은 책방

인류 최초의 글로벌 민주주의자 헤로도토스 본문

산책

인류 최초의 글로벌 민주주의자 헤로도토스

노바리 2013. 12. 25. 16:29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 최성은 옮김, <헤로도토스와의 여행>, 크림슨, 2013

 

학부에 대학원까지 6년 넘게 역사 공부를 했지만 역사의 아버지라는 헤로도토스에 대해선 깊이 배운 적이 없습니다. 그의 저서인 <역사>에 대해서도, 말이 역사지 황당무계한 옛날이야기가 많다고 들어서 딱히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지요. 그런데 폴란드의 기자이며 세계적인 르포 작가인 리샤르드 카푸시친스키가 쓴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을 읽고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당장 <역사>을 읽기로.

 

헤로도토스는 서기전 485년경 비그리스계 종족인 카리아인 아버지와 그리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60세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될 뿐,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살다 죽었는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교관이니 스파이니 설들이 난무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한 가지, 그가 원래 페르시아 영토였던 할리카르나소스 출신이라는 겁니다. 카푸시친스키는 그가 <역사>에서 다양성을 긍정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지적하는데, 어쩌면 아테네 시민권도 가질 수 없었던 변방의 다민족 출신으로, 아버지와 삼촌이 그 지역 독재자에 맞서 반란에 가담했다가 쫓겨난 경험이 그를 다문화를 옹호하는 민주주의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카푸시친스키의 말처럼, 헤로도토스는 소모적 정쟁을 일삼는 그리스 민주정이 일사불란한 페르시아 독재체제에 승리를 거두는 <역사>를 통해 자유가 가진 힘을 보여준 민주주의자였습니다. 나아가 그는 “인류 최초의 글로벌리스트”였습니다. 세상이 가진 문화적 다양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각각의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었지요. 카푸시친스키는 그 근거로 “인류의 역사가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역사>를 쓴다고 밝힌 대목을 인용합니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카푸시친스키의 말처럼 무려 2천 5백 년 전에 ‘인류의 역사’라는 전대미문의 개념을 상상했다고 생각하면 놀랍습니다. 지구상에 수많은 인종과 종족이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금도, 진실로 민족, 아니 자신이 속한 부족 공동체를 넘어 인류의 역사를 사고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면 더욱 그렇지요.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헤로도토스는 또 다른 집필동기로, “사람들이 서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밝힙니다. 동(페르시아)․서(그리스) 분쟁의 현장에서 태어난 그는 전쟁이 왜 일어나고 오랜 반목의 역사가 왜 지속되는지 알기 위해 평생을 바칩니다. 그가 아프리카, 인도, 지중해, 스키타이 지역까지 여행한 것은 호사가적 취미가 아니라, 직접 보고 묻고 듣고 겪으며 이 의문에 최대한 정확히 답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나 평생을 발로 뛰며 취재했음에도 그는 “절대 나는 안다! 고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식도, 인간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는 역사적 사실도 모두 한계가 있음을 알았지요. 그래서 이것이 사실이요 진실이라고 단언하는 대신, “그들이 말하기를” “이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는데”라고 말합니다. 주관적인 해석과 왜곡에서 자유로운 역사란 없음을 드러낸 이런 표현에 대해 카푸시친스키는 이것이야말로 “헤로도토스가 이룬 가장 위대한 발견”일 것이라고 평합니다.

 

50여 년간 인도, 중국, 이란, 아프리카 대륙 등 전 세계 50여 개국을 다닌 카푸시친스키도 헤로도토스의 제자답게 ‘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처음으로 국경을 넘어 도착한 인도에서, 보이지 않는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인 중국에서, 소통의 불가능에서 죽음 같은 공포를 느꼈던 아프리카에서, 그는 타 문화에 대한 무지와 무력감, 두려움을 고백합니다. 그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자이며, 그래서 우리는 한 배를 탄 존재라고 말합니다. 헤로도토스가 그랬듯이 모른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할 때 인간에 대한 소통과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이니, 요즘 같은 불통의 시대야말로 그와 여행할 적기가 아닌지요.